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굴욕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로그인만하면 사무실의 동료 직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는 기분으로 로그인해 둘째 언니와 장시간 채팅을 했다. 로그인만 하면 대부분의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재택근무지만 마음만큼은 사무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사무실 바로 옆자리에서도 콰이어트 Q세대답게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몸만 사무실에서 집으로 옮겨왔을 뿐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한번은 우리 회사에서 작품을 준비중이신 중견 감독님께서 어째 영화사가 너무 조용해 영화사 같지가 않고 고시원이나 도서관 같다고 다들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어색해하시길래 요즘은 메신저라는 게 있어서 굳이 말을 안해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메신저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친절하게 시범을 보이며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부디 감독님 영화가 잘 되서 충무로 중견 감독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일단 우리 기획팀의 감독님 작품 흥행에 대한 공식입장은 만장일치 대우려다.


둘째 언니와는 벌써 11월 말인데 올 한해도 작년처럼 하는 일 없이 다 가버렸다는 넋두리부터 시작해서 요즘 영화판 다 망해서 추워죽겠다는 주제로 채팅을 했는데 메인 이슈는 2007년 최고의 굴욕 선정이었다.


개인적인 굴욕이 아니라 영화사에서 겪었던 일과 관련된 굴욕으로 범위를 좁혔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굴욕들이 떠올라 합의는 보기 힘들었지만 현재 작품들의 연이은 대박으로 잘나간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아무개 감독님에게 누추하지만 우리 회사에 오셔서 작품 연출 좀 해달라고 정중하게 시나리오 한편 전달했다가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거 아니라고 벌건 대낮에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꾸중 들었던 사건이 유력한 올해 최고의 굴욕상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그 날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회사에는 감독과 배우가 약하다는 이유로 메인 투자가 되지 않는 작품이 한 편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투자가 될 조짐이 보이지 않아 회사에서는 만약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아무개 감독님께서 연출을 맡아준다면 스타 배우로 캐스팅이 될테고 메인 투자도 결정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아무개 감독님의 조감독과 친구 사이인 나에게 시나리오 전달 임무를 맡겼다.


무능력한 나에게 이 날 이때까지 월급을 준 회사에 보은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 감독님의 조감독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아무개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한편을 전달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마침 우리 회사 앞 커피숍에서 아무개 감독님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시나리오 들고 나오라고 했고 나는 이 기쁜 소식을 회사에 전했다.


흥행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주고 오겠다고 하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이렇게 빨리 일이 되다니라고 놀라워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며 드디어 나도 밥값 한번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회사 앞 커피숍에 가자 아무개 감독님이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간략하게 자기 소개를 드리고 명함과 함께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감독님이 우리 회사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길래 나는 늘 하던 레파토리대로 회사의 히스토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일이 잘되려는지 아무개 감독님은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호감을 표시하셨고 작품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현재는 어떤 단계인지 궁금해하다고 설명을 부탁했다. 시나리오 전달 임무를 맡은지 1시간도 안되 시나리오가 전달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 까지는 좋았다. 정말 일이 잘 되려는가보다 싶어 잔뜩 기대에 부풀었고 충무로에 럭셔리 꽃미남으로 널리 알려진 친구에게 나중에 거하게 술이든 뭐든 쏴야겠다고 다짐했다.


감독님에게 현재 이 작품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솔직하게 고백한 다음 정중하게 연출을 부탁드렸는데 나의 고백을 다 들은 감독님은 무슨 그런 족보없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개같은 경우가 있냐며 조용하게 화를 내셨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무리가 있는 부탁이었지만 막상 씨네21에서만 보던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흥행 감독님이 화를 내는 걸 보고 있으려니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을 하려고 했다는 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나를 자리에 부른 친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워하며 분위기를 수습하려했고 감독님은 잠시 후 화를 가라앉히고 시나리오 따윈 테이블 구석으로 던져놓고는 영화 일을 그 따위로 하면 안된다고 훈계를 하셨다. 나는 감사히 꾸중을 듣고 언제 소주나 한잔 하자는 위로와 함께 바로 회사로 돌아왔다.


팀장에게 일을 그 따위로 하는게 아니라는 꾸중만 들었다고 보고하자 회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 분위기로 돌아갔고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 칼퇴근했다.


나는 이 사건을 올해 최고의 굴욕상 후보로 밀었고 언니는 그건 회사가 쪽팔린 거지 니가 쪽팔려할 일이 아니라며 마지못해 합의해주었다.


감독님과의 만남을 주선해준 친구에게 전화해 그 날의 미팅이 올해 최고의 굴욕상을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주었다. 친구는 아니나다를까 감독님도 영화일 하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고 심심할 때마다 그 날 일에 대해 얘기하고 어설픈 미팅을 주선한 자기한테도 앞으론 잘 알아보고 일처리하라고 한소리하셨지만 다 지나버린 옛날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 작품은 결국 엎어졌다.

덧글

  •  N 2007/11/22 08:50 # 삭제 답글

    2007/11/22 03:20
    제가 좋아하는 라디오방송을 할 때쯔음 글을 쓰셨네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애드맨님이 크나큰 실수를 하신것도 아닌듯한데...
    역시 가진 사람이 그런 큰 소리(?)를 할 수 있는걸까요...

    한가지 아이러니한건...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 부분이네요...

    이건 애드맨님의 마음이 들어간 소중한 배려인것일까요...
  •  ky 2007/11/22 09:22 # 삭제 답글

    전 이게 그렇게 욕을 먹여야 할 짓이란걸 잘 모르겠네요
    정말 모르는 사람에게 이게 왜 그렇게 상도덕에 어긋나는짓인지 가르쳐주셨음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저게 그렇게 개같은 경우 인가요?
  •  애드맨 2007/11/22 09:51 # 답글

    차마 공개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상도덕까진 아니더라도 백프로 우리 잘못 맞습니다.
  •  heinkel111 2007/11/22 09:52 # 답글

    제가 보기에는 힘있는자의 횡포였다고 생각이드네요.
  •  오거 2007/11/22 10:07 # 답글

    밸리타고 왔습니다.
    이미 감독과 배우가 결정되어있는데 '투자가 안된다'는 이유로 회사가 감독을 바꾸려고 한 점이 거슬렸던 걸까요.
  •  이방인 2007/11/22 11:54 # 답글

    끄응.
  •  오도리 2007/11/22 11:56 # 답글

    이 블로그를 읽다보니 왠지 모르게 <전차남>이 생각나네요. 애드맨님의 블로그에 찐한 연애+재취업 혹은 월급받기 스토리가 가미되면 훌륭한 시나리오가 나올 것 같습니다.. ^^
  •  2007/11/22 12:4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유성 2007/11/22 12:45 # 답글

    어라,.... 간간히 애드님 글 읽어보면 잔잔히 글쓰시는게 재미있기는 했는데...... 여자분이였습니까?;;;

    지금까지 난 왜 남자분인줄 알았지? -_-;;
  •  2007/11/22 12:4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JINN 2007/11/22 23:06 # 답글

    유성님/회사에서 '언니'라는 호칭은 대략 남녀 공용이지 않나요? ^^ 불쑥 끼어들어 죄송합니당.
  •  핑크로봇 2007/11/23 01:06 # 답글

    헛... 저도 여태껏 남자분인 줄 생각했다가 언니 호칭을 보고 여자분이구나 했는데......
    그런데 '언니'라고 부르면 여자분들 기분 나빠 하시지 않나요? 음....
  •  심리 2007/11/23 07:48 # 답글

    그 감독님을 언찮게 해드릴 만한 무슨 사정이 있었나보지요. 아뭏든 힘 내십시오!
    상황이 어렵다보면 서로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생기고 그런가봅니다. 그럴수록 침착해야겠지요.

    애드맨 님께서 전에 쓰신 글로 미루어보면 애드맨 님은 남자분으로 보이는데요.
    '언니'라는 단어는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선배를 남녀 불문하고 지칭하던 단어이기도 하지 않았었나요? ^~^
    '형'이라는 단어가 대학에서 남녀 불문하고 선배나 학우에 대해 쓰는 호칭이듯이오.
  •  유성 2007/11/23 09:56 # 답글

    JINN님,심리님// 어라... 여자분들이 남자 선배나 자신보다 나이많은 남성에서 형이라고 하는것은 가끔 보기는 했지만 (보통 활발한 분들이 자주 그러던데..) 남자가 여자분께 그러는건 처음 들었는걸요?

    아니.. 시장이나 장사하시는분들이 그러시는건 듣기는 했지만 그건 나이많은 여자분(상인)도 여자손님에게 호칭할때 자주쓰는거라 그려러니 했는데... 실제로 제 주변이나 경험상 그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는걸요....

    아무튼... 새로운것을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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