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1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착한 거짓말

 


우리 망해가는 영화사에는 제작비를 더 이상 구하지 못해 촬영이 중단된 영화가 한편 있다.


술마신 밤이면 늘 그렇듯 잠이 안와서 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 영화가 끝끝내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고 엎어지면 그동안 고생한 감독과 스텝들의 마음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할지 내가 스텝이라고 생각하고 상상을 해 보았다. 천문학적인 피같은 돈을 날리는 투자자의 심정은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현장에서 밥차로 끼니를 때우며 모텔에서 수많은 날들을 지새우며 고생한 스텝들의 노고와 허무함은 억지로 상상하면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시나리오 작가의 원통함은 내가 미쳐 상상하지 못했었다. 제작이 중단되더라도 받을 돈 다 받았으면 그걸로 뭘찍건 신경끄고 다른 작품 구상하면서 행복하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영화사에서 진행하다 제작이 중단된 작품의 작가님은 그렇지 않았다.


방송국 드라마 작가와는 달리 한국 영화계에서의 시나리오 작가란 존재는 촬영과 동시에 잊혀진다. 고사 지낼때도 회사에서 불러는 주지만 자리에 모인 현장 스텝 중에 아는 사람이 없어 혼자 뻘쭘하게 절 순서를 기다리다 절하고 돈내고 집에 간다.


드라마는 한회 촬영 끝나면 시청자 반응보고 다음 회 대본을 작업하는 촬영과 집필의 동시 진행 시스템이지만 영화는 촬영 전에 대본을 다 써서 넘겨버리기 때문에 크랭크인 후에는 작가의 이용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하여간 시나리오 작가의 원통함을 알게 된 계기는 촬영이 중단된 채 오랜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고 있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의 남자 친구와의 전화통화였다.

어느 날 저녁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길래 사채광고 전화겠거니 생각하고 심드렁하게 받았다. 잠깐의 침묵 후 낯선 남자가 내 이름을 대며 아무개씨 핸드폰이죠?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호감형은 아니어서 잠깐 긴장을 했는데 남자는 자기가 제작 중단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의 남자 친구라고 정체를 밝혔다.


작가의 남자 친구가 왜 나한테 전화를 했는지 작가는 왜 남자 친구를 시켜서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 그 작가와 친하지 않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잠깐 머리가 복잡했는데 남자는 내가 그걸 궁금해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작가와 친한 우리 영화사의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전화를 해봤는데 통화가 되질 않아서 결국 알지도 못하는 나의 핸드폰 번호를 명함에서 찾아보고 전화를 했다고 자초지종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여자 작가가 소심한 성격이라 명함만 받았지 말 한번도 안해본 나에게 전화하는 걸 쑥스러워하길래 옆에서 보고 있기 안스러워 자기가 나섰다는 것이다.


일단 왜 다른 사람들이 작가의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없어서 촬영을 못하고 있고 마지막 촬영 이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돈을 구할 확률은 낮아지고 엎어질 확률은 높아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조만간 자신의 시나리오를 스크린으로 볼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행복해하던 작가에게 통보하는 악역을 맡기가 싫었던 것이다.


정밀 건강검진을 마친 환자에게 당신은 시한부 인생이니 남은 인생 잘 정리하세요라고 말하는 의사의 심정과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남은 인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환자일 경우에는 보호자와 상의 후 환자의 심적 충격 완화와 모르는게 약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고도 들었다.


나는 제작 중단된 작품의 작가의 남자친구에게 조만간 다시 촬영이 시작될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거침없이 밝은 톤으로 말해주었다. 남자는 정보 감사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엿듣고 있던 여자 작가의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그때가 저녁 6시쯤이었는데 두사람은 나의 거짓말을 듣고 기분 좋다고 비싸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갔을 수도 있겠다.


나에겐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꿈이 있다.

덧글

  •  나그네 2007/10/18 07:35 # 삭제 답글

    "나에겐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꿈이 있다."
    마지막 말씀에 코 끝이 찡했습니다.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되어 출근도장만 찍고 있는 팬입니다. 눈팅만 하다가 기어이 오늘은 인사 여쭙니다.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얘기들이 많아서 무척이나 속상합니다만 그래도 누군가 대신 이렇게 기록을 남겨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소박한 바램입니다만 나중에 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들을 모으셔서 책으로 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훌쩍거리며 블로그를 다녀가던 나그네였습니다.
  •  joyce 2007/10/18 10:08 # 답글

    좋네요.
  •  老姜君 2007/10/18 12:17 # 답글

    나에겐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다는 꿈이 있다.
    ...가슴이 아려오는 마지막 한마디입니다.
  •  검은머리요다 2007/10/18 13:21 # 답글

    애드맨님.. 거침없이 나가리다.. 말씀해주실줄 알았는데. 마음이 아프셨군요.
  •  카렌 2007/10/18 14:40 # 답글

    작가 신세... 너무너무 공감 가는군요. 놀러가도 아무도 안좋아하는 -_-;
  •  LUNA 2007/10/18 14:49 # 답글

    영화관련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데요, 자주 와서 보고 가요. 여기 올때마다 느끼는건 수능을 다시볼까 하는 덧없는 마음이;;;; 그그래도 희희희망은 이이이있겠죠???
  •  애드맨 2007/10/18 22:45 # 답글

    나그네님 // 자비출판은 싫습니다 ㅎㅎ
    joyce님 // 감사요.
    老姜君님 // 제 꿈이 누군가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니 왠지 기분이 묘합니다.
    검은머리요다님 // 네;;
    카렌님 // 안좋아한다기보다는 무관심에 가까워요.
    LUNA님 // 행복하세요^^~
  •  therefore 2007/10/19 00:06 # 답글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이 포스트가 명문인 이유는
    "기분 좋다고 비싸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갔을 수도 있겠다"입니다.

    방송국 작가들의 사정도 잘 알고 계실줄은 몰랐습니다.
    방송국에서 작가들이 시나리오 작가들 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작품이 굴러갈때 그 작품에 대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라엘 2007/10/27 15:03 # 답글

    ... 에휴... 남일이 아니야.. ㅜㅅㅜ 마음이 아픕니다... 저도 종종 이런 거짓말 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