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평판 조회

 




영화가 다양한 사람들과 모여서 하는 일이다보니 잊을만하면 한번씩 정기적으로 오는 전화가 있다. 바로 내가 아는 혹은 나와 함께 일했던 아무개의 평판 조회 전화다.

평판 조회란 한팀에서 영화일을 하려는 사람에 대해 예전 팀에서 함께 일했던 스텝들이 어떤 평가를 하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생각은 필요없고 주로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 몸을 쓰는 실무적인 현장일이라는게 학벌 등의 간판이나 토익 점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믿을 거라곤 평판 조회 뿐이다. 평판 조회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을 잘한다는 증거가 되는 작품 수 뿐인데 참여한 작품 수를 늘리려면 평판 조회가 좋아야 하니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별 상관은 없는 얘기지만 예전에 해외 로케 100프로인 모 영화에서 영어는 필수고 제2외국어까지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연출부를 뽑은 적이 있다는데 다 뽑아놓고는 영화가 엎어졌다고 하니 평판 조회 이외의 기준으로 연출부를 뽑아도 결국은 잘 안되나 보다.


나는 모질지 못한 편이라 누군가 아무개가 어떠냐고 물어오면 응 사람 좋아. 착해. 라는 식의 대답을 주로 하는 편인데 평판 조회를 한 두명에게 하는 것이 아니어서 같이 일하기 부담스러운 느낌의 스텝은 결과적으로 평판 조회에서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같이 일하던 영화인 중 한 명은 자기가 아는 충무로 영화인이 수백명이기 때문에 내 눈에 나면 다신 충무로에 발 못 붙일 줄 알라며 자기 말을 잘 들어야 충무로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 그 스텝은 영화일을 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어떤 영화인 한 명도 뭔가 기분이 나쁠때마다 수 틀리면 충무로에 소문 내버리는 수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는데 역시 그 분도 영화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나에 대해 엄청나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는 영화인도 있었다는데 그 분 역시 지금은 영화일을 하고 있지 않다.


공교롭게도 영화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이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치고 오래 버티는 사람을 못 본 거 같은데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동안 만났던 한때 영화인이었으나 지금은 아닌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영화일을 오래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10년만 버티면 개나 소나 감독한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망해가는 영화사에서도 수틀리면 인사고과에 반영해버린다는 말을 즐겨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 직원이 영화일을 그만두기 전에 회사가 먼저 망할 것 같다.


내가 망해가는 영화사에 흘러들어와 비공식 업무일지를 연재하게 된 건 영화인 평판 조회에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으니 자기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즐겨했던 몇몇 영화인들과 사이가 나빳기 때문일까? 적어도 이 블로그의 주인이 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다시는 좋은 평판 조회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말로만 듣던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려나.


인사고과고 평판조회고 뭐고 이번 달 월급이나 빨리 줬으면 좋겠다.

신정아 사건 이후 기업들 채용기준 ‘간판보다 평판’으로

덧글

  •  하아 2007/10/06 18:55 # 삭제 답글

    저 역시 면접가서 예전에 일했던 곳의 대표님과 아는사이면 좋고 나쁨을 떠나 당황하고는 하지요.
    일했던 기간 길었어도 비해 나올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나온곳은 아예 이력서에 쓰지 말까 생각중이예요.
    여튼 이런 평판조사가 필요한건 사실이지만, 그 후 그 전쪽 사무실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멋쩍은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듯 합니다.
  •  애드맨 2007/10/06 20:33 # 답글

    많이 당황스럽죠 ㅎㅎ
  •  RIRUKA 2007/10/06 22:35 # 삭제 답글

    연예계(?)가 그럴싸해 보여도 사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부분은 한정되어 있고, 특성상 종사자 중에는 겉과 속이 다른 양반들이 워낙 많아서인지, 유독 평판조회가 활발(?)한 분야인듯 합니다.
    저도 평판 조회 전화를 가끔 받습니다만, 그냥 좋다 좋다 얘기해줍니다.
    내 한마디에 사람 인생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면 야박하게 못하겠더군요. 남들은 어떻게 얘기해줄 지 모르지만 말이지요.

    사람을 고르는 것도 CEO의 능력인데, 매사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평가하는 대표들이 많다보니 나도 곤란하고, 구직자도 곤란합니다.
  •  애드맨 2007/10/06 23:06 # 답글

    RIRUKA님 // 분명히 그럴싸할게 없는데 그럴싸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은 언제나 존경스럽습니다.
  •  카렌 2007/10/06 23:50 # 답글

    저도 한때 영화인이었고 그러고 싶지만 그들이 아무 영향을 못주는게 서글프군요,
  •  애드맨 2007/10/07 00:49 # 답글

    카렌님 // 한때 영화인이었다니 선배님이시겠군요. 반갑습니다.
  •  이방인 2007/10/07 03:05 # 답글

    바닥이 좁은 곳일수록 소문은 소설이 되는 것을 경험해 본바, 그것이 대입하기 딱 좋은 공식은 아닐 지언정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조금은 느끼고 있는 지나가던 1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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