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반값 사무실

 


우여곡절 끝에 반값 사무실로 이사를 끝냈다. 새 사무실은 전 사무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보증금과 임대료가 반값이다보니 전철역에서는 두배 멀어졌고 넓이는 반으로 줄었다. 대한민국 부동산 정확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두배 멀어진 관계로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할 필요가 없고 넓이가 반으로 줄어들어 직원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더 가까워져 건강하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까진 좋은데 사무실에 볕이 잘 들지 않고 내 자리에서는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누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놓고 직원들간의 기싸움이 대단했는데 결국은 사내정치에서 우위에 있는 팀이 명당을 차지했고 월급과 점심만 축내고 있는 우리팀은 썩 좋다고는 볼 수 없는 자리에 배치되었다. 태양을 피하기엔 딱 좋은 자리다.


다 좋은데 주변에 사무실이 별로 없는지 식당이 별로 없다는 점은 매우 불만이다.


마침 이사한 사무실 근처에 친구가 다니는 영화사가 있다길래 놀러가봤는데 신생 영화사 주제에 이런 불황에 어디서 돈이 났는지 우리 사무실의 세배 넓이에 전망도 탁 트인 양지에 위치해있었다. 개봉한 영화도 제작 준비 중인 영화도 크랭크인 한 영화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사정이 좋을 수도 있겠다. 예전의 우리 회사처럼.


친구는 파티션이 낮아서 방음이 잘 안된다고 짜증을 냈는데 배부른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커피 한잔 마시고 나와 우리 사무실을 구경시켜주었다. 처음엔 좀 놀라는 눈치더니 아늑한게 가족적이고 좋네 좋아하더니 바쁘다며 바로 돌아가버렸다. 어째 날 바라보는 표정이 조금 찝찝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의 표정이 예전에 내가 다른 친구가 다니는 신생 영화사에 놀러갔을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한 것 같다.


친구가 다니던 신생 영화사는 전철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있지 않았다. 일단 서울 외곽에 있는 전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 정도를 간 후 내려서 또 15분 정도를 더 걸어들어가야했다.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1층에는 슈퍼마켓이 있어 군것질에 최적화된 사무실이었다. 사실은 사무실 건물도 아니고 그냥 조금 넓은 원룸에 가까웠다.


돈이나 받고 일하는건지 궁금했는데 친구의 말에 의하면 대표가 영화는 돈이 아니라 열정으로 만드는 거라고 젊은 사람이 돈 너무 좋아하면 크게 되기 힘들다며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면 대박 터진 다음에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대표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아무도 대표의 과거는 모른단다. 여기서 영화 만들 수 있겠냐고 안스러워했더니 우리 대표 좋은 사람이라는 말만 반복하던 친구의 씁쓸하면서도 희망섞인 눈빛이 기억난다. 물론 그 영화사는 얼마 뒤 망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무실 집기 정리 정돈을 마치고 청소 당번을 정했는데 내 차례가 돌아오려면 제법 시간이 지나야했다. 우리팀끼리 은밀한 회식에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내가 이 사무실을 청소할 차례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전반적인 사내 분위기가 학창시절 학년 말 분위기와 유사하다.

덧글

  •  이적 2007/10/24 23:41 # 답글

    무언가 리얼리티 드라마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아무튼 이사 축하드립니다.;;
    모쪼록 이블로그가 쭉 이어가길 그리고 [잘나가는...]으로이름이 바뀌길 바라겠습니다.
  •  2007/10/25 00: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老姜君 2007/10/25 01:46 # 답글

    덕분에 오늘도 씁쓸하게 웃고 가지만, 정말 제목이 좋은 쪽으로 바뀌길 바라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럼 볼거리가 줄어들지도(...)
  •  울트라맨 2007/10/25 08:54 # 삭제 답글

    꼭 사무실 청소를 하실 수 있도록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를 살짝 빌어봅니다..
  •  dARTH jADE 2007/10/25 09:07 # 답글

    이사 축하드립니다 ^^
  •  오사쯔 2007/10/25 10:11 # 삭제 답글

    은밀한 회식때 나올말이 저도 궁금하네요...
    아. 그러고보니 회식은 어제 밤이었으니...곧 포스팅에서...............
  •  마리 2007/10/25 11:05 # 답글

    전기 배선이 잘 되어야 할텐데요. 전에 있던 사무실 전기 연결을 잘못해서 사무실 바닥 한 가운데 전선이 가로질러 있어 여러 번 넘어졌거든요.
  •  아슈 2007/10/25 11:36 # 답글

    아 왠지 포스트가 기다려지기도 하면서 읽을 때마다 왠지, 사무실도 가까운 이분과 술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  N 2007/10/25 21:17 # 삭제 답글

    색시몽 소감평은 언제 올리실랑가요... (홍차)
  •  검은머리요다 2007/10/26 00:04 # 답글

    부동산의 다른 용도.. 길가다가 아무리 찾아도 모르면 부동산가서 물어봐요. 그럼 조금은 귀찮아 하면서 우월한 자의 태도로 알려주시죠.
  •  애드맨 2007/10/26 03:25 # 답글

    이적님 // 재미있어야 할텐데요.
    비공개님 // 재기 ㅋㅋ
    老姜君님 // 확실히 바빠지면 블로그에 소홀할지도 ㅎㅎ
    울트라맨 // 그래도 청소는 싫어요ㅜㅜ
    dARTH jADE님 // 감사합니다.
    오사쯔님 // 회식은 오늘일텐데요.
    마리님 // 걸려 넘어질만한 전선은 다행이 보이지 않네요.
    아슈님 // 많이 가까운가봐요 ㅎㅎ
    N님 // 지송요. 딱히 소감이 없네요.
    검은머리요다님 // 공감! 붐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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