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냉정과 열정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 일하는 언니가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장편 상업 영화는 아니고 단편 영화를 한편 만들려는데 시나리오와 헌팅은 마쳤으니 이제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수년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고맙고 친한 언니가 영화를 만든다는데 집에서 놀고 있는 주제에 당연히 도와줘야겠지만 내 상황이 예전같지 않아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차분하게 생각한 후 냉정하게 거절했다.


한 장소에서 만드는 짧고 간단한 영화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 추운 겨울날 실내도 아닌 삭풍이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최소한 일주일은 서울 시내 여기저기와 경기도까지 돌아다니며 낮이고 밤이고 카메라와 조명기를 붙들고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을 통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가 시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학교 다닐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뒤늦게 뜬금없이 단편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갑자기 열정이 불타오르기라도 했냐고 물어봤다.


언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내 돈으로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이 말리고 있지만 요 몇일 영화제 수상 단편 영화들을 쭉 찾아봤는데 별 거 없더라며 자기라고 영화를 만들어서 상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냐고 나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단편 영화 잘만들어서 칸느 국제 영화제라도 갔다온다면 제작비 500만원 정도는 투자할 가치가 있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읽어본 느낌으로는 비록 흥행 예상은 거의 틀렸지만 칸느는커녕 국내 영화제 본선 진출도 힘들거 같다고 냉정하고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이미 단편 영화 감독 입봉을 결심한 언니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단편 영화를 만든 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서 이미 수 없이 겪어봐서인지 단편 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언니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한편 찍어보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민폐 다 끼쳐가며 괴롭히다가 결국 영화는 완성도 못하고 남은 필름은 불태워버린 열정만 가득했던 내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를 만들려던 시절이 생각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언니는 사람도 좋고 평소 인간관계가 좋아 영화 제작을 도와주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못 도와주는 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야속하다고 원망도 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언니의 열정이 부러웠다.

나의 열정은 어디로...

덧글

  •  영화인 2007/11/19 14:08 # 삭제 답글

    언니 이뻐요? 도와 줄 수 있는데...
  •  이방인 2007/11/19 14:32 # 답글

    열정... 으음...
  •  심리 2007/11/19 19:10 # 답글

    열정은 소중해요. 꿈이니까요. 하지만 걱정은 되네요. 영화는 각본이 좋아야 성공한다는 게 필수인데 말예요.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얕보는 태도도 문제는 문제입니다. 철저하게 연구 분석해서 정석을 따르지 않으면 헛점들 때문에 실패할 수 있잖아요. 영화 제작은 돈이 한두 푼 드는 일도 아니니...... 부디 그 분께서 준비를 충실히 하셨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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