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옷차림

 


영화 인생 초창기 시절 윗사람에게 쇼비지니스 업계인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옷을 잘 입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분은 언제나 남들 옷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고 관심도 많으셨는데 회사에 출근하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사람들의 의상 품평이었다.


개성있고 독특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직원은 무척이나 이뻐했고 무식하고 구리게 입고 다니는 직원은 준엄하게 구박했기 때문에 회사 내에선 옷 잘입는 사람의 말빨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열배는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는 맞춰 입고 다니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였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분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쪽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기성세대와 제도권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내가 뭘 입고 다니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 노선이어서 그분이 뭔 소리를 하든 쌩까고 살았지만 몇 달 못가 아침마다 들려오는 잔소리에 질려버려 결국엔 그분의 취향에 나를 끼워 맞춰버렸다.


체제에 순응하니 몸은 편했지만 속으로는 남의 옷에 신경쓸 정력으로 영화나 잘 만드시라는 생각 뿐이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개봉 후 쪽박도 그냥 쪽박이 아니라 DOG쪽박을 차버렸다.


그 분과 결별한 이후로 영화일을 제대로 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와는 반대로 영화일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옷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는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왔는데 개인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옷을 잘 입든 못 입든 명품을 입든 짝퉁을 입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옷차림과 그 영화의 흥행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 대표는 영화일을 하려면 옷을 제대로 입어야된다고 생각하는 중에서도 하이클래스 멋쟁이 명품족이다. 처음엔 <어머나. 이를 어쩌나.> 지출해야 될 옷값을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직원들의 복장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다는데 다행히 초반에만 잠깐 그러다 직원들의 무반응에 포기하셨단다. 고마웠다.


그러나 대표가 아무 말을 안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윗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옷을 맞춰 입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회사 구성원들의 옷차림과 회사의 운명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최근에 들은 소문으로는 한 글자 제목 액션 영화를 만들고 투자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재일교포 감독도 영화를 하려면 옷부터 잘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본인 역시 제법 스타일리시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이쯤되면 옷차림과 영화일의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데 아직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에게 2007년 겨울 새옷은 필요없을 것 같다.

덧글

  •  2007/11/09 10:5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네오바람 2007/11/09 11:40 # 답글

    수 말하시는거군요 ㄱ-
  •  이방인 2007/11/09 14:37 # 답글

    이제부터 포스팅 하는 진정한 묘미가...ㅎㄷㄷ
  •  하치 2007/11/09 15:18 # 답글

    한글자 제목 액션영화 ^^;;;;;;;;
  •  오사쯔 2007/11/09 16:58 # 삭제 답글

    여전히 열혈구독!
  •  알렉스 2007/11/09 17:45 # 삭제 답글

    촌,철,살,인! 쾌,도,난,담!
    여기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
    근질근질했던 곳을 꼭꼭 집어서 긁어주시는 센스!
    너무 좋아요~
  •  가그네 2007/11/10 03:25 # 삭제 답글

    신상옥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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