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통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간단하게 맥주한잔 팀회식 자리에서 우리의 맏언니께서는 회사 사정상 밀린 월급과 다음 월급이 언제부터 지급될지는 아무도 모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잘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다음주부터는 출근 안하고 짐싸서 나가란 말이냐고 물어보니 아 그건 아니고 계속 출근은 해도 되는데 월급은 기다리지 말고 회사 사정이 좋아지길 기다리면서 대박 아이템을 발견하면 언제든지 추천하라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월급이 나오는거냐고 물어보니 정말 대박 아이템이라면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월급도 안 나오는 상태에서 정말 대박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면 굳이 우리 회사에서 할 필요도 없고 조건이 더 좋은 회사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자 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는데 앞으로는 아이템을 제안하려면 감독과 작가까지 패키지로 묶어 오라고 덧붙이셨다.


대박 아이템을 발견해서 감독과 작가까지 엮을 수 있다면 영화사 직원이 아니라 차승재나 강우석인데 지금 하신 말씀이 말이 되는 것 같냐고 물어보니 이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를 살릴 수 없고 지금 이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고 있으니 자기도 어떻게 해야될지 고민 중인데 하여간 계속 끌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건 자기의 생각이 아니고 자기도 얼마 전에 대표에게 들은 말이라고 덧붙였다.


다들 어려울텐데 미안할 거 없고 오히려 그동안 삽질만 해서 회사에 누를 끼친 내가 더 미안하다고 비통해하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똘똘한 둘째 언니는 회사가 이렇게 된 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한국영화계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고 그동안 우리가 일을 안 한것도 아니니 미안할 필요는 없고 차분히 출근하며 밀린 월급을 기다리는게 맞다고 조언해주셨다. 맏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같이 출근하며 온갖 정이 다든 가족같은 사람들과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대충 얘기가 정리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둘째는 그동안 내가 하라는 데로만 했으면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원통해했는데 생각해보니 둘째가 하라는 데로만 했으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모두가 딱히 더 할 말이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올라와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마시고 싶었는데 돈 낼 사람 주머니 사정도 뻔히 알고 내가 긁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어서 남은 술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를 나가라는 건 아닌데 월급은 언제 나올지 모르고 밀린 월급은 기다리지 말고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추천하되 다른 회사에서 해도 말리지는 않겠다니 아직도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이런 식의 통보가 말로만 들어오던 권고사직이나 정리해고의 부드러운 버전인걸까?


그동안 아침 출근 때마다 일주일을 일요일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멀지 않은 미래에 상상이 현실이 될 것같다.

오늘 처음으로 블로그에 글쓰기가 귀찮게 느껴졌는데 이대로 무너지긴 싫었다.

덧글

  •  마리 2007/10/27 01:58 # 답글

    아아 애드맨님... 오늘 처음으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  달콤베이비 2007/10/27 02:07 # 답글

    똘똘한 둘째 언니 라인으로 붙는 게 그나마 좋을 거 같네요..
  •  하치 2007/10/27 04:34 # 답글

    정말 난해하네요. 애드맨님이 어떤 결정을 하실지;;;;
  •  애드맨 2007/10/27 06:07 # 답글

    마리님 // 비록 블로그 덧글에서지만 자주 뵈서 정들어버렸어요 ㅎㅎ
    달콤베이비님 // 안그래도 고민 중입니다.
    하치님 // 저의 결정은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  NINA 2007/10/27 08:30 # 답글

    이런말씀 드리기엔 제가 아는건 없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먼 훗날 뒤돌아봤을때 오히려 개인의 도약의 발판 및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老姜君 2007/10/27 12:46 # 답글

    다른 말은 드릴게 없고, 그저 힘 내시길 바랍니다.
  •  2007/10/27 12:5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j 2007/10/27 15:09 # 삭제 답글

    어떤결정을 내리실지 궁금합니다. 화이팅 힘내세요..
  •  2007/10/27 15: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방인 2007/10/27 16:27 # 답글

    으음...
  •  DarthSage 2007/10/28 00:28 # 답글

    덧글달기엔 참 할말이 없어서 안달고 있었는데 정말 오늘은 힘내시라는 말 한마디 하고 싶어졌습니다.
  •  애드맨 2007/10/28 00:47 # 답글

    불쌍한척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격려 감사합니다.^^
    비공개1님 //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비공개2님 // 아...
  •  검은머리요다 2007/10/28 12:46 # 답글

    이거 참... 회사에 나갈 수도 안 나갈수도 없네요... 화장실에서 일보다가 전화왔을때 처럼.. 그냥 일볼수도 없고.. 전화안받을 수도 없고.
  •  동경 2007/10/28 19:11 # 답글

    월급도 안 나오는 망해가는 영화사 때려치우고 차라리 글을 쓰셈
    이라고 조심스레(과연?) 충언을 드리고 싶으나
    영화를 많이 좋아하시죠?
    월급이 안 나와도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  울트라맨 2007/10/29 08:34 # 삭제 답글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못받는 위치는 아니고...못주는 위치..-_-;;)
    회사는 망해도 사람은 남는다는 아주 고리타분한 멘트가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거나, 이덯게 상황이 흘러가더라도 지금 그 곳의 사람을 잃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막장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나중에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되더군요..

    이번 주말에 한국 영화 한 편 봐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좀 도움이 되려나요..

    뜨읍
  •  dARTH jADE 2007/10/29 10:36 # 답글

    아아. 결국 올 것이 왔군요. 힘내세요.
  •  오사쯔 2007/10/29 11:14 # 삭제 답글

    아..울트라맨님의 말씀처럼 지금 그곳의 사람...잃지 않으셨으면 해요. 정말.
    훔.......이제 글을 못보게 되는건가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새로운 출발. 이라는 제목의 글을 볼순 없을지요....ㅡ.ㅡ;;
  •  소심뒤끝 2007/10/29 13:23 # 삭제 답글

    처음으로 글 남깁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기대할 상황이 아니라면, 부업으로 눈을 돌리심이 어떠할런지요?
    글솜씨도 있으시고 하니, 못해도 생활비 정도는 ..(쿨럭..-_-;;)
  •  푸른 2007/10/29 22:05 # 답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


    일이 잘 풀리어서 새로운 도약의 기점이 되길 바랍니다. ^ㅅ^
  •  애드맨 2007/10/30 00:54 # 답글

    검은머리요다님 // 그럴땐 일 봐야죠 ㅎ
    동경님 // 글은 다니면서도 쓸 수 있어서요^^;;
    울트라맨님 // 요즘 주변에서 막장 소리를 많이 들어서 어느새 친숙해졌습니다. 정감있는 조언 감사합니다.^^
    dARTH jADE님 // 넵!
    오사쯔님 // 글은 회사랑 상관없이 아무때나 쓰려구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새출발 같습니다.ㅎ
    소심뒤끝님 // 생활비를 벌 수 있을 정도의 글로 하는 부업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만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하신거 같아요^^;;
    푸른님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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