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므흣한 소개팅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귀성을 거부하고 서울에 홀로 남아있는 혼기 꽉찬 영화인 동갑내기 두 명에게 소개팅을 시켜주었다.


소개팅을 주선한지가 오래되서 몰랐는데 요즘 소개팅은 그냥 남자에게 여자 전화번호만 알려주면 당사자 둘이 알아서 하는 시스템이라 주선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하여간 여자에게 허락을 받고 남자에게 여자 전화번호를 알려주니 역시 알아서 잘 진행되었다. 그렇게 둘이서 만날 약속을 잡고 지들끼리 알아서 다 하는 모습을 보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싶었다. 그래서 둘은 만났다. 그냥 만난 것도 아니고 귀성객들이 빠져나가 한적한 서울 시내에서 아담과 이브처럼 오붓하게 사이좋게 잘 만난 것 같았다.


남자가 소개팅 도중에 소개시켜 주어서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는 대충 알 수 있었다. 남자에게 문자를 받자마자 여자에게 문자로 속마음을 떠보니 ‘고마워. 담에 내가 술한잔 살께’라는 문자가 온 걸로 봐선 여자도 제법 만족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선행을 한 기분이었다.


문제는 둘이 만나서 어떻게 됐는지 너무 궁금해죽겠는데 밤 12시가 되도 새벽 1시가 되도 새벽 2시가 되도 새벽 3시가 되도 다음날 아침이 되도 뭐가 어떻게 됐다는 전화가 오질 않는 것이다.


남자는 고향이 지방이라 시내에서 혼자 원룸에서 살고 있고 여자도 고향이 지방이라 혼자 원룸에서 사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원룸은 걸어서 30분 거리다. 여자가 혼자 살기 때문에 소개팅이 끝나면 끝났다고 연락을 해줘야 안심하고 잘 수 있을텐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 잠도 제대로 못잤다. 두 남녀의 집이 가까우니까 남자가 잘 알아서 데려다줬겠거니 생각하고 신경 끄고 자려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이 가깝다보니 더 신경이 쓰이고 싱숭생숭한게 잠이 오질 않았다.


남자는 영화판에 뛰어든지 제법 오래되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고 여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늘씬한데 역시 영화판에 남자와 비슷한 시기에 뛰어들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잠깐 들은 얘기로는 서로 영화만 같이 안 했다 뿐이지 아는 영화인 대부분이 한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금방 친해졌을테고 마음씨 좋은 선남선녀라 흉한 꼴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다.


소개팅 후 24시간이 지났고 내일은 휴일이고 내일모레는 추석인데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두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고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결국 이렇게 나만의 비밀 블로그에다 털어놓게 되었다. 블로그에다 털어놓는다고 두 사람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소개팅 주선자인 나에게 연락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내 문자와 전화를 지금 이시간까지 씹고 있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잤으면 잤다고 허심탄회하게 연락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부디 서로에게 낭만적인 연휴가 되고 있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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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Kitano 2007/09/24 02:14 # 답글

    왠지 흉한 꼴이 아니라..흐으으음..
    마지막 줄의 의견에 저도 1표를;;
  •  검은머리요다 2007/09/24 12:11 # 답글

    아이참. 말안해도 서로 통하는 그 무엇.
  •  이방인 2007/09/24 12:30 # 답글

    부럽;;
  •  달콤베이비 2007/09/24 17:02 # 삭제 답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늘씬한 여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영화인의 원룸에 순순히 따라갈리 없습니다.
    30평대 아파트에 자취하는 솔로남이면 모를까...
    아님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키도 늘씬할 뿐 아니라 정말정말 착한 여자던지....
    아님 영화인에게만 흥분하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남자가 뻘짓하다가 끝났을 겁니다. 넘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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