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먹튀사고

 


얼마 전에 주선했던 소개팅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일이 잘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모르는게 약이라고 그냥 계속 모른 척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당사자인 소개녀에게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론스타 먹튀 사건과 비슷했다.


소개팅 당일. 얘기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좋고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1차는 2차로 이어지고 2차는 3차로 이어지고 밤이 늦어 커피나 한잔 하려고 집에까지 따라갔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해피타임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 날 이후 명절 내내 해피타임이었다는 뉘앙스였다.


문제는 일이 성사된 후 남자의 태도인데 여자는 사귀는 것을 전제로 기꺼이 해피타임을 함께 했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나에게 더 시간을 줘라는 말만 반복하며 해피타임만 몇 일 더 연장하고 질질 끌면서 확답을 주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개팅 후 몇일 되지 않았으니 남자 말대로 시간을 좀 줘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피타임 이후 남자는 연락하지 않고 여자가 언제나 먼저 전화했다고 하니 이미 게임은 끝난 것 같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며 전화를 끊었다.


굳이 전화해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예의상 전화를 해보니 왠일로 통화가 됐다. 아무리 남자끼리지만 그래도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싶어 간접적으로 이리 저리 빙빙 말을 돌리며 소개팅녀에 대한 느낌을 물어보니 착하고 귀엽긴 한데 자기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냥 좋은 친구로만 지내고 싶다고 했다. 결국 안 이뻐서 사귀기 싫다는 뜻이다. 아마 소개녀도 눈치는 챘지만 확인사살을 바랬겠지.


다 큰 성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고 나는 주선만 했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주선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껴 소개녀에게 전화로 소개남은 당신에게 마음이 없다며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잠시 후 소개녀는 남자가 영 시원찮아 아까운 시간만 버렸다며 언제 술이나 한잔 사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서울은 정글.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동네다.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고 냉정한 상황 파악이 필요하고 착각은 절대 금물이다.


지금 소개녀의 심리 상태가 무료로 각색안 보내고 몇일 후 퇴짜 통보 받은 무명 작가의 심정과 비슷할까? 입사원서내고 면접에서 온갖 재롱 다 부리고 불합격 통보 받은 입사 지원자의 심정과 비슷할까? 망해가는 영화사 대표가 자기를 자신의 상사보다 더 신뢰하고 인정하는 줄 알고 충성을 다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직속 상사의 심정과 비슷할까?


아무래도 나는 소개팅 주선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이 소개녀에게만 이번 추석 소개팅까지 포함해서 4번의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매번 불발이었고 결국은 어디가서 누구에게 말도 못할 불명예스러운 먹튀 사고까지 터졌다.


영화를 하다 보면 누구를 소개하고 소개받는 일이 대부분인데 이번 먹튀 사고를 계기로 나의 사람보는 안목없음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소개팅 뿐만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더욱 신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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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달콤베이비 2007/09/27 03:39 # 삭제 답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키도 큰 여직원을 제 머릿속에선 소녀시대 윤아로 설정하고 읽고 있었는데 지금의 전개에 너무나도 당황스럽습니다.
    소개팅남 ㅆㅂㄻ
  •  커억. 2007/09/27 08:30 # 삭제 답글

    대책없는 심각한 먹튀로군요-_-

    ... 영화관련 업계에. 그런 먹튀가 좀 많은 편인가요? 주변에서도 영화 하신다는 (실제로 설마 하진 않겠지만.).. 그런 사기꾼들이 좀 많아서 말이죠...

    하긴 어디라고 먹튀가 없겠습니까만은...

    어케 제가 아는 영화 한다는 분들중에서 이미지가 떠오르는거 같기도 하고.참..
  •  Labyrins 2007/09/27 09:31 # 답글

    무도회장에서의 즉석 만남이 아닌 지인을 통한 소개팅에서는 행하기 쉽지 않은 행동이군요..-_-;
    너무 빠르게 해피타임을 가진 것이 문제이지만, 남자가 전형적인 XXX 스타일이네요..
  •  애드맨 2007/09/27 12:26 # 답글

    달콤베이비님//객관적인 외모 묘사는 아니었어요. 죄송요;
    labyrins님//남녀관계는 어찌될지 모르니 해피엔딩이 될 수도;;
    커억님//어디라고 먹튀가 없겠습니까만은...이 글의 주제입니다.

    사실은 저도 지은 죄가 많아서...
  •  이방인 2007/09/27 12:42 # 답글

    해피타임... 여자가 너무 불쌍해진다...ㅠ.ㅜ
  •  mrkwang 2007/09/27 14:26 # 답글

    -_-;
  •  검은머리요다 2007/09/29 16:55 # 답글

    맘에 안들면 건들지나 말것이지.이런 강아지새끼 같은.
    그나 저나 애드맨님도 맘 많이 상하셨겠는 걸요.......
  •   2007/10/18 03:14 # 삭제 답글

    내용은 슬픈데.. 글을 재밌게 쓰셔서 웃음이나네요 ㅎㅎ 글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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