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전철과 버스는 끊겼지만 택시비를 아껴보겠다고 한시간 넘게 집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버스 정류장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처음보는 미모의 아가씨 한명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갓길에는 그녀의 차로 보이는 인피니티 한대가 서있었다. 인피니티를 타는 미모의 아가씨의 존재는 심야 새벽길을 홀로 걷는 남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무슨 일로 저런 럭셔리한 미모의 아가씨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통화를 하는걸까 궁금했지만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괜히 구경하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관심없는 척 느린 발걸음으로 내 갈길을 가고 있었다. 인피니티는 짙게 선팅되어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 안에는 남자가 한 명 타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전화 안 받어. 자꾸 거짓말할래?>등의 대사가 하이톤으로 들려오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이성과의 통화 같았다. 상대방이 아가씨의 전화를 피하고 있기 때문에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으로 짐작됐는데 내가 옆으로 지나갈 때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해! 안들려?>라는 대사가 들려왔다. 전화가 끊긴 것이다. 아가씨는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중전화 주변엔 나외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둘러보더니 고함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얼굴 표정으로 어리버리한 인상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리 미모의 아가씨라도 인적이 드문 새벽길에서 무서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면 반가울 리가 없다. 이쁜 아가씨 뒤엔 남자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 저 차안에는 나보다 덩치 크고 싸움도 잘하는 남자가 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언제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냐는 듯 3월의 햇살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길거리에서 사탕이 포장된 안마 전단지 나눠주는 여대생(?) 말고는 나에게 이렇게 과감하게다가오는 아가씨는 겪은 적이 없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녀는 간드러진 눈웃음과 애교섞인 목소리로 <죄송한데요. 핸드폰 좀 빌려주실래요?>라 말하며 섬섬옥수같은 손을 고압적으로 내밀었다.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핸드폰만 빌려주면 뭐라도 빼줄듯한 미소를 날리는 처음보는 아가씨에게 핸드폰을 빌려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빌려주지 않았을 때 포기해야할 가능성이 정신없이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가까이서 보니 인피니티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이 야심한 밤거리는 보기와는 다르게 과감한 그녀와 나 우리 둘만의 거리였다.
처음보는 남자에게 거침없이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대담함과 이 여자가 나에게 한눈에 반했나 싶은 착각에 아무 말 없이 통화료가 한달 연체중인 핸드폰을 기꺼이 꺼내주었다. 인피니티를 타고 다닐 정도의 여자가 핸드폰 통화료 아끼겠다고 남의 핸드폰을 빌릴 것 같진 않았고 그녀와는 달리 내차는 커녕 통화료도 한달 연체중인 내가 돕지 않으면 안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려니 했다.
겨우 핸드폰 하나 빌려준 걸로 생색내긴 싫었지만 혹시나 핸드폰을 빌려준 대가로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면 어쩌나 내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알아서 저장해버리면 어쩌나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폴더를 열더니 다시 무서운 얼굴로 변신한후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어두워서인지 나이를 짐작하기는 힘든 스타일이었다.
<엄마다. 너 오늘 학원 빠졌다며? 엄마한테 자꾸 거짓말하면 아빠한테 이른다. 빨리 안 들어와!! 거기 어디라구? 엄마가 데리러간다니깐!!>
아가씬줄 알았던 그녀는 아들과의 통화를 짧고 굵게 마치고 뻘줌하게 서 있는 나에게 <고마워요.>란 말과 함께 핸드폰을 돌려주고 인피니티를 타고 밤거리로 사라졌다.
그녀가 나를 두고 떠난 이 거리. 내 핸드폰엔 그녀의 아들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덧글
슈타인호프 2007/11/13 12:21 # 삭제 답글
역시 아줌마의 힘!!인 겁니까^^;;- .......헐 낚였다
- ..........이럴수가...
- ........우와.
-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군요...
"그녀가 나를 두고 떠난 이 거리. 내 핸드폰엔 그녀의 아들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무섭다. 아줌마. 크앙.
- =_=b
- 내일 전화해서 엄마 전화번호좀 가르쳐 달라고 하셔요.
- 아줌마면 더 쉬울수도..
혹시 용돈도 받아가면서...
암튼 재밌네요 ㅋㅋ - ㅋㅋ 재밌네요....반전...ㅋㅋ 엄마다!..ㅋㅋ
- ... 아들과의 연애 시작?
- ....그 말로만 듣던 유부녀 공략 루트....ㅡㅡ;;;;
- ㅊ푸ㅏ하ㅠㅏㅠㅏㅠㅠㅠㅠ 아 수업시간에 안웃을려고 힘들었습니다ㅠㅠㅠㅠ
재밌었어요ㅠㅠㅠ(... 베르단디 2007/11/13 15:30 # 삭제 답글
..................ㅇㅅㅇ
대단하군요...............
하하;;;- 흠, 딸일수도 있지 않나요? ㅋㅋ
- ...미모의 아주머니시군요 ㅇ_ㅇ;;;
- ㅋㅋ 못 살겠습니다.
- 아아 아주머니...
- 능수능란한 반전! 아아 정말 허를 찔렸습니다
- 푸하하하하... ㅠㅠ
- 세상에 너무 멋진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 하하하하하
- 만약 낯선 여인이 알고보니 이글루스 유저고 이 블로그를 보고 비공개 덧글로 연락처를 남기면 님은 핸드폰남이 되겠군요. 그녀의 별명은 인피니티?ㅋ
- 푸하하하 ㅠㅠㅠ 머..멋진데요 ㅠㅠㅠ
요새 어머님들 너무 이쁘셔서 외모만 보고 나이짐작하기 어렵죠.. /침
랄까 아줌마들 너무 이쁘고 젊으셔서 숫자상만의 제 나이가 부끄럽.. - 다른 얘기지만 전 전화 빌려드리고나서 용돈받은적이 있어요.(실제로)
- 우왕ㅋ굳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이오공감에 올라올 만한 대반전~굿잡~!
-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일까나요 -틀린데..
공감에서 보고 왔습니다. 마지막 반전이 강하네요 ^^ - 헐 , 아줌마였군요. 대단한 반전
- 이거 슬픈데요 (....)
- 공감보고 왔습니다... "아빠"한테 이른다는 멘트도 날렸으니 이건 뭐 건질건 없겠군요..(뭐??!!)
그저 한여름 아니 한가을밤의 꿈 'ㅅ' - ㅎㅎ 반전이네요
제가 다 아쉽습니다 ㅋ - 정말....재밌군요 ㅋㅋ
- 눈에서 땀이 나는군요..
- 이거 왠지 완전 제대로 낚인듯한 기분.
- 글이 좔좔좔좔 읽어지는 게 참 좋네요. 재미있었습니다. ^ㅡ^
- 이거 정말 무섭네요 ㅋㅋㅋㅋ 역시 어머니는 강합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멋진 어머님이시군요 -_-b - 왠지 아쉬운데요. 뭔가 좀 더...(어이)
- 인피니티 어머님이시군요.
따님 번호일 수도 있습니다 -_-v - ...쿨럭.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군요.. -_-;;
예전에 아무생각 없이 휴대폰 빌려줬다가 아무기대 안했는데 사탕 한웅큼 받았던 일이 떠오르네요..; - 두근두근 기대를 하고 읽었습니다. 충격적인 결말이네요. 아하하하하하하 ^^
어찌보면 훈훈하달까..-_-;;; ^_^; 잘 보고 갑니다. - 충격이 크셨겠어요. 잠 못이루실듯... ^0^;;;
- 이오공감에서 보고왔습니다.
눈에서 땀이나는 이야기로군요...ㅜㅜ
그러고보니 요즘 어머님들은 (과제와 시험과 취업에 찌든) 현역 여대생보다 아름다우시죠... - 그녀의 아들번호가...... 마무리가 굿
- 반전 짱입니다.
- 계속 느끼는 거지만 애드맨님은 영화계를 떠나시면 작가의 길을 걸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소재를 잡아내는 눈과 글을 엮어내는 솜씨가 보통 수준이 아니세요. 물론 역시나 배고픈 길이긴 합니다만, 쿨럭..
- 으아.. 이.공감에서 왔습니다:D
마지막 대반전 장난아닌데요 T_T!!! - 왜이리 눈물이 날까요... [...]
-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 아줌마 너무좋아 볼수록 너무좋아
꽃보다 아름다운 아줌마 정말 좋아
좋아 좋아 너무좋아 아줌마가 너무좋아
사는게 힘들어도 아줌마가 정말 좋아
아줌마 가는길에 행복과 사랑주네
꽃보다 아름다운 아줌마 정말 좋아
아줌마 가는길에 행복과 사랑주네
꽃보다 아름다운 아줌마 정말 좋아
곱게 늙은 아줌마 하나 열 영계 안 부럽다 - 저는 왜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학원 안 가고 방황하고 있는 아들네미 걱정이 더 될까요[...] 불쌍한 학생들같으니[응?]
- 우하하, 재미있었습니다 ^^
- 블로그명이 왠지 익숙해서 와봤더니 ..^^ 반전이 참.. 생각도 못한 ㅎㅎㅎ 잘 읽었어요~
- 근데 인피니티에 남자가 타고 있었다면
그분은
과연
그 여자분의 """"남편""""이었을까요?
끗 - 그 여자분의 """"남편""""이었을까요? 2222222 이게 더 궁금..ㅋㅋㅋ
공감 타고 들어왔는데 너무 재미있는 글이네요ㅋㅋㅋ
요즘 아이들의 어머님들 정말 관리 철저히 하시는데 이 사실을 입증시켜주는 글일수도.ㅎㅎ - 와... 막강 반전...
- 으악. 사무실에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풋!!!!!'하고 말았습니다.
- ㅋㅋ, 잘 읽었습니다...^^
- 파다닥파다닥~ 잘 보고 갑니다^^
- 처음 보는 여자한테 핸드폰 빌려준 경험이라면 아가씨는 아니고 아줌마한테는 있습니다
라고 하려고 했는데 같은 처지였군요. - 많이 웃었습니다.
익명의 블로거로 남길 원하시니 메일로 정보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체된 휴대폰 요금 지불 하시고 그 밖에 각종 고정지출 정도는 무리 없이 벌 수 있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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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이 어려우실텐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꼭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matrose4ever@naver.com
- 잼있었습니다
- 오옷.. 엄청난 대반전!!!!!!!!!!!!!!!!!!!!!!!!
- 올해 본 포스트중 손꼽히는 반전!! ㅋㅋ
- 아- 어머님, 너무 하셨어요. 제 친구는 밤에 집에 오다가 남자분이 핸드폰 빌려달래서 아무 생각 없이 빌려줬더니 전화번호를 저장해갔다고 하던데, 이건 완전 반전인데요!
- 푸하하 ^ ^
마지막 반전, 이거 완전히 유주얼 서스펙트급인데요? ㅋ - 어머님의 자식 사랑이었군요. 요즘은 유부녀도 아름답군요.
- 큭, 눈에서 온천이 샘솟고 있어요.
- 글 너무 재밌게 잘 쓰시는거 같아요. 반전 최고.ㅎㅎㅎ
- 으흑흑...흐그흑
- 와 진짜 촐라 욱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토닥토닥
전화기를 든채 인피니티가 사라진 어두운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처연한 모습을 생각하니 ... 빰빠라빰빰 콩크레츄레이션 - 나이좀 드신 분일것 같은데...
상당한 미모였나보네요..
재미난 경험..ㅋㅋ - 힘내세요. 그래도 핸드폰을 건네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 빌려준게 오히려 미련도 안 남고 좋은 거 같아요. 핸폰은 삼개월 연체면 끊기던가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얼마전 전화기 한번 쓰게 해줬더니 5000원주고 가는 아주머니(?)도 있었답니다.
무슨 일인줄은 잘 모르지만 신신당부를 해가며 말이죠.
어떤분은 만원도 막 줄려고 하더군요. (술취한 아저씨)- 웃겨죽겠어요. 미치겠어요.
또읽었어요!!!
아하하하하하 - 반전 최고 입니다.
- 외롭네요. 아아..
- 저런... 핸드폰 빌리러 온 여자분이 혹시 자신에게 반해서 그런것은 아닐까 생각하시다니 ..... 앞에서 머리만 매만져도 자신을 신경써서 그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꼭 계시던데 ㅋㅋㅋㅋㅋ 순수하시다고 해야할지 여자분들 참 곤란하게 하신달지 ㅋㅋㅋㅋㅋ 여튼 반전이 재미있네요^^ 그나저나 저기 통화하셨던 어머님 아들이 그날 밤 방황말고 집에 잘 들어갔길 바래봅니다
- 반전이군요-ㅁ-;;;; 허허허
- .... 굿!!
- ㅎㅎ 반전영화의 한장면 같군요..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그리고..달필이시네요
- 달필..이란 표현 좋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달필이십니다.
잔재주라 과소평가치 마시고 부디 대성하십시오. - 풉.......너무 웃겨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개콘 소재로 써도 되겠어요..ㅎㅎ 완전 웃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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