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딜레마

 


기획팀 넘버원투가 기획 회의 중에 각자의 영화 인생을 걸고 논쟁을 벌이면 나는 딱히 할 일이 없다. 넘버원투가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해질 정도로 격하게 논쟁을 벌이다 잠깐이나마 소강상태가 되면 나에게 누구 생각이 맞는 것 같냐고 물어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이리 저리 말을 빙빙 돌리다가 애매모호하게 결론을 내리곤 한다.


어떤 책을 보니 공동 작업 중 다른 사람들이 바보라서 더 이상의 회의는 의미없다고 혼자서 조용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바보라고 하던데 내가 제일 바보라고 해도 딱히 부정하고 싶진 않다.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 탓이겠지만 이 좁은 회의실 안에서 우리끼리 치고 박고 싸워봤자 생산적인 대안은 나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엔 논쟁을 즐겨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넘버원투의 안목은 영 별로야 형편없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렇다면 저 안목에 의해 발탁된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바로 넘버원투 덕분에 여기서 월급받으며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영화를 만들 능력이 없어 보이고 답이 나오지 않는 회의가 부질없게 느껴져도 결국은 누워서 침 뱉는 기분이 든다. 이런게 딜레마라는 걸까?


그러나 가끔은 누워서 침 뱉는 기분이 들더라도 미친 척 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혹독하게 제대로 논쟁을 했더라면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넘버 투가 넘버 원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넘버 투는 넘버 원에게 자기가 하란대로 했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성토의 한방을 날렸는데 말 잘하기로 소문난 넘버 원은 자기가 하란대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며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뭐하냐고 보기 좋게 한방을 되돌려줬다. 보기 좋게 한방 되돌려 맞은 넘버투는 당신이 한건 뭐냐고 묻는 넘버원에게 아무런 할말이 없는지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회의는 끝났다.


영화사에 이렇게 말 잘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많은데 영화를 실제로 만들어서 개봉도 시킨 영화사엔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뛰어난 사람들이 만든 영화들이 대부분 쪽박을 차서 영화판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라도 있던 걸까? 이 모든게 인재라면 사실은 똑똑하지 않다는 얘기일까?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가 열리고 아무런 결론 없이 회의가 끝나길 반복하다보니 회의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회의가 짧아지다 보니 대화도 줄어가고 대화가 줄다보니 사무실은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전화도 예전보다 적게 울려 직원들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데 뭐하고 있나 힐끔 힐끔 훔쳐보면 네이버와 엠에스엔 혹은 네이트온이 대부분이다. 물론 내 컴퓨터 모니터도 네이버가 대부분이라 가끔은 내가 네이버에서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어쨌거나 영화인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는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기로 했다.

덧글

  •  푸른 2007/10/09 03:48 # 답글

    링크 타고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네요. 아직 안 망했군요. 다행입니다, 라고 말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현장감이 살아나는 뼈아픈 글입니다.

    영화쪽만큼 변덕스러운 곳도 없지 싶어요. 힘들더라도 오래오래 살아남으세요. 아자!
  •  애드맨 2007/10/09 10:59 # 답글

    푸른님 // 세상 좁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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