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작가미팅

 

 

내가 만약 포항 근처에 사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고 가정을 해봤다.


나는 포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가 되기 위해 취업은 하지 않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DVD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손님들에게 영화를 추천해준 후 재밌었다는 얘기를 듣는 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물론 대부분이 남녀 커플인 손님들은 영화를 틀어줘도 딴짓만 하지만 DVD방 점원으로 위장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아무 영화나 추천하진 않는다.


비록 고시원에 기거하며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지만 각종 시나리오 작법 책만큼은 출간되는 대로 다 구입한다. 시나리오 작법 책 중엔 뭐니뭐니해도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가 최고다. DVD방 일이 고되고 힘들 때면 비디오방 알바에서 세계적인 감독인 된 타란티노를 생각하며 힘을 낸다. 타란티노와 나의 차이는 비디오가게 알바와 DVD방 알바의 차이일 뿐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써오던 시나리오를 드디어 완성한다. 이제 영화사에 팔아야 되는데 영화사에 아는 사람이 없다. 직접 영화사에 전화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마켓에 시나리오를 등록한다. 2만원을 내야하고 영화사와 계약을 하면 3%를 떼줘야한다는 조건이 영 내키진 않지만 대안이 없다. 안그래도 어려운 형편에 2만원이나 내고 시나리오를 등록했다가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으면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타격이 클 것 같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 KTX타고 서울에 가서 영화사 직접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주고 오는 것 보다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등록한 후 하루이틀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2만원이 아깝다. 그 돈이면 친구들에게 삽겹살에 소주 한번은 쏠 수 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기다려본다.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다. 좌절이다.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DVD방에서 일하며 힘들게 쓴 시나리오였는데 왜 세상은 나를 몰라주는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반쯤은 포기한채 또 다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아직은 새 시나리오를 쓸 여력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02-5XX로 시작하는 번호가 핸드폰에 뜬다. 이거 서울에서 온 전화같은데...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000작가님이죠? 저는 00영화사의 애드맨입니다.> 아아...귀를 의심한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 전화는 바로 애타게 기다려온 서울에 있는 영화사에서 온 전화다. 영화사 직원이 내 시나리오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온다. 전화로 얘기하려니 답답하다. 그냥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다. 영화사 직원도 만나자고는 하는데 포항이라고 하자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어차피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갈 예정이었다고 거짓말을하니 그럼 겸사 겸사해서 보자고 한다.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큰맘먹고 KTX를 탄다. 강남에 위치한 영화사로 찾아간다. 서울은 와본 적 있지만 강남은 처음이다. 예의바르게 생긴 영화사 직원이 작가님이라고 불러주고 맛있는 식사도 대접한다. 여기까지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식사 후 사무실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한다. 영화사 인테리어가 좋고 직원들 인상도 좋아 양아치 영화사 같진 않다. 바로 작가 계약하자고 하면 좋을텐데 이런 저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에 대해 물어온다.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대안도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생각해보겠다고만 한다.


한 시간도 안되서 미팅은 끝났다. 이대로 KTX타고 집에 가야 되나? 조금 허탈하다. 아무런 소득이 없다. 애드맨이라는 영화사 직원은 시나리오를 사겠다는 말은 절대로 안 한다. 그냥 내부 회의를 더 하고 연락주겠다는 애매한 말만 되풀이 한다. 얘기가 잘되면 서울 시내 구경도 하고 군대 동기 녀석들도 만나려 했는데 왕복 차비 생각하면 그럴 여유도 없다. 영화사에서 나와 바로 KTX에 몸을 실었다.


몇 일 후 영화사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는 회사에서 모니터 결과가 안 좋아 진행하지 못하게 됐으니 미안하단다. 이런...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 처음부터 서울로 오라고 하질 말던가. 음..내가 먼저 올라가겠다고 했구나. 그래도 좀 말려주지. 그냥 영화 예매권이나 좀 달라고 하니 꼭 챙겨주겠다고 한다. 그나마 고맙네. 힘이 빠진다. 쓰기 싫다.


나의 전화 한통 때문에 멀리 서울까지 왔다가 허탕만 치고 간 000작가님에게 힘 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이렇게 대신한다. 시나리오를 살 것도 아니면서 힘내라고 하면 작가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먼길 오신 작가님이 사무실을 떠날 때 지었던 허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예매권 몇 장을 보내드렸던 기억이 난다. 비록 첫 작품은 불발로 끝났지만 재기발랄한 차기작으로 보란 듯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 때문에 창작 의욕을 상실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회사의 내부 모니터 결과 따윈 신경쓰지 말고 부디 내년엔 더 멋진 작품으로 컴백하셨으면 좋겠다.

덧글

  •  空我 2007/11/29 00:03 # 삭제 답글

    왠지 눈물이 나는 에피소드군요 ;
  •  이방인 2007/11/29 00:35 # 삭제 답글

    으음. 모두들 힘내시길...
  •  teardrop 2007/11/29 00:47 # 삭제 답글

    언젠가 나도 그런식으로 누군가를 대했을것이고 그런 대접을 받았을 것이니, 생각하면 많이 미안하고 서글프다.
  •  레이린 2007/11/29 01:18 # 삭제 답글

    지부를 두고 계셨더군요. 저는 egloos쪽만 알았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소시적 애드맨님 사연인듯한 느낌이...
  •  혜진 2007/11/29 09:33 # 삭제 답글

    저도 왠지 울컥.. >,<
  •  라엘 2007/11/29 10:45 # 삭제 답글

    ... 그러니까, 꿈만 갖고는 먹고 살 수가 없는 거죠.
  •   협 2007/11/29 11:51 # 삭제 답글

    슬프네요...
  •  마리 2007/11/29 12:59 # 삭제 답글

    저도 가끔씩 제가 다니던 망해가는 출판사에 열심히 원고를 들고 오시던 작가분들이 생각나 마음 한 켠이 숙연해진답니다.
  •  heve 2007/11/30 02:22 # 삭제 답글

    시련이 있어야 풍부해지니까요.
    사려깊군요.
  •  마력덩어리 2007/11/30 15:51 # 삭제 답글

    경험은 힘입니다.
  •  아슈 2007/11/30 17:55 # 삭제 답글

    어제 학원에서 (영어 관련 학원) 선생님이 이러시더군요.
    '혹시 돈 많이 벌고 싶은 분 있으세요? 그러면 시나리오를 쓰세요.
    제가 그쪽에 또 관심이 많아서 한 두편 쓰고 그랬는데요.
    관심있으신 분들 있으면 제가 또 가르쳐드릴께요.'

    분명히 애드맨님 글에서 시나리오 뿌러진 슬픈 얘기를 봤었는데...
    이 얘기 들으면 무슨 기분이 드실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  심리 2007/11/30 22:42 # 삭제 답글

    도전이 없으면 성공도 없겠지요. 단번에 안 되어도 용기를 내고 준비해서 다시........
    세상일에 쉬운 건 없는 거겠지요. 어렵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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