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크린경마

 


오늘 하루 방문객이 지난 3개월 방문객 수보다 더 많고 애드센스도 100달러를 훌쩍 돌파해버렸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 사이에 혹시나 고맙게도 누군가 댓글을 달아주지 않으셨을까 확인하기 위해 접속했다가 두자리수로 달린 댓글과 수만명에 이르는 방문객 수를 보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유입경로는 무심코 올린 다음 블로거뉴스.


하루에 수만명이 방문하는 블로그에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마음 속의 비밀을 털어놓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가 발각될 것 같다. 몇몇 댓글은 영화인이 달아주신 것 같은데 영화판이 좁아서 아마 한 두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일 확률 90프로다. 내가 누군지 알겠더라도 울 사장한테는 모른 척 해주길 바랄 뿐이다.


방문객 수 올려보려고 기를 쓰고 발악할 때는 아무도 안 오더니 마음을 비우고 진솔하게 회사 뒷담화를 늘어놓으니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신다. 들킬까봐 가슴은 두근거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발각될 때까지 일기쓰듯 매일 매일 연재해야겠다. 다행히 회사 사람 누구에게서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어쩌구에 관련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이게 다 신정아 문화일보 올누드 기사 덕분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오후에 예정되었던 회의가 취소되서 시나리오 마켓에 새로 올라온 시나리오와 일본 소설을 검토하며 오후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예전에 잠깐 일하다 진행비 몇 푼 받고 짤린 심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물론 심씨는 아니지만 일단 심작가라고 해 두자.


일이 있어 (근처에 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하지만 별 일이란 없다.) 회사 근처에 왔는데 새로 구상하고 있는 시나리오 얘기도 하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진행비도 안나오는데 만나면 내가 커피라도 사야되는 분위기라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심작가에게는 공짜술을 포함한 향응을 제공받은 바 있어 쌩깔 수가 없었다. 내 직속 상사인 황언니에게 심작가가 근처에 와서 만나고 오겠다고 했더니 별 영양가도 없는 일에 귀중한 업무시간을 낭비하려 하냐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대충 쌩까고 나왔다.


심작가는 언제나 그렇듯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몇 년 전 ㅇㅇ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한동안은 이 영화사 저 영화사 불려다니며 잘 나가는 듯 했지만 손대는 작품마다 엎어졌고 이제는 더 이상 불러주는 회사도 없는 처지라 그런지 항상 기가 죽어있고 조금은 비굴하게도 보인다.


심작가가 우리 회사와 일하게 된 계기는 내가 추천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지만 사람도 나쁘지 않고 공모전에서 수상했던 작품도 제법 괜찮아 회사에서 진행 중인 작품의 각색 작가로 추천했을때 별 반대는 없었다. 문제는 심작가가 보내준 결과물이 형편없다는 사실. 술과 게임 그리고 도박에 기를 다 뺏겨서인지 마감 하루 전에 대충 끄적인 느낌이고 성의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몇푼 안되는 진행비만 날렸다는 분위기였다. 황언니에게 더 이상 심작가한테는 진행비 못준다는 얘기를 듣고 몇일 후 심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원래 맘이 여려 이런 말은 잘 못하는 편인데 심작가님과 우리 회사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떠듬 떠듬 말을 더듬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심작가는 고맙게도 ‘아쉽네요. 언제 술이나 한잔 해요’ 라는 말만 남기고 바로 전화를 끊어주었다.


그 후 한참 연락이 없다가 오늘 회사 근처로 왔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커피숍에 앉아 영화계가 어려워서 힘들어 죽겠다는 얘기를 십여분 나누다가 새로 구상했다는 작품 얘기를 십여분 쯤 한후 (회사에서 관심갖을 가능성 제로) 신정아 누드사진 얘기를 이십분쯤하며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음모론으로 담소를 나누다보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커피도 다 마셨고 길거리 여자 구경도 지겹고 딱히 더 이상 할말도 없어 그만 일어서려는데 자기랑 경마나 하러 가자며 꼬시기 시작했다. 울 회사 근처에 비밀 스크린 경마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거 다 사기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프로 겜블러라 돈을 딸 수 있으니까 자기만 믿으라는 거다. 자기만 따라하면 돈 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그 말을 믿진 않았지만 스크린경마장에 가본적이 한번도 없어 경험삼아 심작가를 따라 스크린경마장에 갔다. 마침 황언니에게 일이 있어 먼저 퇴근한다고 문자가 와서 굳이 사무실에 일찍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어두컴컴한 스크린경마장에서 심작가는 한시간만에 십이만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나는 삼만원을 날렸다. 심작가는 오늘은 안되는 날이라며 나한테 집에 갈 차비하게 만원만 꿔달라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만원을 꿔주고(돈을 길바닥에 버리는 기분이었다ㅜㅜ) 회사로 돌아왔다.


경마장에서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본 심작가의 뒷모습이 한동안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신용불량이고 빚도 많다는데 아무래도 심작가는 도박 중독인 것 같아 안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지금 심작가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일은 금요일. 일주일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해야되는 주간회의 날이다. 일주일동안 책과 시나리오들을 검토한 결과 대박 아이템은 없었다는 얘기를 지난 주에 이어 또 해야 된다. 입사 초기에는 엄한 아이템이라도 일단 추천하고 봤는데 추천작에 대한 실망이 거듭되자 나의 안목을 의심하기 시작해 이젠 아무 아이템이나 추천하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이 갑갑한데 그래도 내일이 지나면 주말이다.

덧글

  •  검은머리요다 2007/09/14 01:43 # 답글

    오~ 이제목을 포털에서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애드님글이었군요~~~~~우와
    영화쪽일을 하시는 군요.. 에고 마음이 아픕니다. 해뜰날이 있을 겁니다.
  •  애드맨 2007/09/14 14:36 # 답글

    반가워요~
  •  노란싹수 2007/12/05 02:44 # 답글

    뒤늦게 와서 애드맨님의 글을 하나 둘 꺼내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글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  환상연인 2008/12/15 22:50 # 삭제 답글

    애드맨님, 비공식업무일지는 대박 아이템이 아닌가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만.
  •  아리스 2010/12/07 23:14 # 삭제 답글

    저도 뒤늦게 블로그를 발견하고 설레는 맘으로 아껴읽고있는 1인입니당
    영화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지고 있는 대학생인데 이런 글만 읽어도 설레네요ㅠㅠ
    부디 최신 글에는 '잘나가는 영화사'이야기가 있길 바라며!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