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불길한 예감

 


예전에 작가와 조감독으로 만났던 아무개 조감독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세월이 흘러 조감독은 감독이 됐고 작가는 이 바닥 저 바닥 전전하다 영화사 직원이 됐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나니 예전처럼 패기넘치는 작가와 조감독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 그 시절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 시절이라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패기와 열정이 흘러넘쳤기 때문인지 좋은 일만 기억났다.


한참을 즐겁게 옛날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씁쓸해졌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누굴 만나도 자꾸 옛날 옛적 좋았던 시절 얘기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조만간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다시는 영화일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주 드는데 옛날 얘기와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몇 년 전에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할아버지 영화 감독들이 조그만 사무실에 모여앉아 짜장면 한그릇씩 배달시켜 놓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자리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그들의 옛날 얘기는 대부분 <누가 누구랑 잤었지, 아니야 그날 내가 잤어, 걔가 참 괜찮았는데 말야, 거짓말 하지 말어, 진짜라니깐, 설렁탕은 어디가 맛있지, 아니야 그 옆집이 더 맛있어> 등의 영화 제작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담배 연기로 가득찬 사무실에서 할아버지 감독 대여섯명이 모여앉아 영화 얘기는 하지 않고 맛있는 식당 얘기와 여배우들과 재미 본 얘기만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절대로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 상태로 아무 일 못하고 몇 년 지나면 나는 저런 얘기조차 할 수 없는 한때 잠깐 영화계 주변에서 얼쩡댔던 영화인 지망생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나와 같은 출발선에 있던 아무개는 영화를 만들어서 극장 개봉까지 한 진짜 감독이지만 나는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는 영화사 직원일 뿐이라는 자격지심에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고 했다. 치열하게 현장에서 뒹굴며 영화를 찍은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이 치열하게 영화를 찍을 동안 규칙적으로 출퇴근하고 주5일이라 토요일엔 놀고 사무실에선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다고 할 수도 없어 빨리 집에 가서 스타리그나 봐야겠는 마음만 가득했는데 마침 옛날 얘기꺼리도 다 떨어질 때쯤 아무개 감독은 뜬금없이 작품 하나 같이 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동안 나 혼자 신나서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가 상처도 많이 받고 깨질만큼 깨지고 지칠만큼 지쳤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영화 한편 같이 하자는 제안을 들으면 귀가 솔깃하고 피가 끓어올랐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쯤은 기대를 접은 상태로 작품 설명을 들었는데 우습게도 조건반사처럼 여건만 맞는다면 같이 하고 싶다는 대답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문제는 여건만 맞는다면인데 여건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다보면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이제 재방송은 지겹다. 아무개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여건이 조성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고 나는 또 다시 조건반사처럼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도 연락을 달라고 빈말을 했다.


집에 돌아와 아무개 감독의 작품에 관객이 몇 명 들었는지 검색해봤다.

숫자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 없어 눈물이 앞을 가릴 뻔 했다.

덧글

  •  심리 2007/11/22 23:09 # 답글

    힘 내십시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수많은 올챙이 중에서 살아남은 새끼들만 개구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또는 해변에서 수많은 거북이 새끼들이 깨어나지만 그 중에서 어른 거북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새끼들은 몇 안 된다는 현실과 비슷하달까요.

    저는 연예계 그러면 장동건 님이 생각납니다. 장동건 님이 MBC 신인 탤런트로 입사했을 때 임백천 님이 진행하시던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셨어요. 그 때 입사 동기들 수십 명이 우루루 몰려나왔었지요. 그 중에는 우리 학교 졸업생도 있었답니다. ~_~ 학교에선 유명한 학생이었는데, 장동건과 입사 동기였지요.

    그 수많은 탤런트 지망생 중에 살아남은 게 몇 명일까요? 우리 학교 졸업생은 동네 건달 역 같은 단역 몇 번 하다가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장동건 말고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입사 동기가 있기나 한지......

    오늘날도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이 스타를 꿈꾸며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고생도 직사하게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빛 보고 대형 스타 되는 사람은 사실 몇 안 되지요. 연예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국가대표 선발되고 금메달 따는 것보다 힘들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여배우와 잔 이야기하는 원로 감독님들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배우 박중훈 님의 말씀이 생각 나네요. 영화판에서 바람 안 피운 남자 배우는, 자신이 알기로는 안성기 선배님이 유일하다는...... ~_~

    소피 마르소를 비롯한 여러 여배우들이 감독님과 맺어지기도 했지만, 듣고 보니 좀 씁쓸하긴 하네요. 물론 과거와 오늘날의 모습은 또 다르겠지만요. 발전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할텐데, 외적으로 성공하는 것이야 미지수지만, 최소한 자신의 노력에 자부심을 가질 정도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어떨까 싶네요.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삶 말이지요.
  •  이방인 2007/11/23 00:04 # 답글

    울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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