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정지음 작가의 '언러키 스타트업'을 읽고..



주인공은 스타트업이라고 분류되는 어느 영세 기업의 1인 팀장이자 막내인 김다정 주임이고 정지음 작가는 김다정 주임과 동료 직원들을 통해 회사의 대표인 박국제를 조롱하고 비난하는데 소설 분량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했다만 개인적으로는 영세 기업에서 고생하는 김다정 주임과 그녀의 동료 직원들보다 그 영세 기업을 운영하느라 고군분투 중인 박국제 대표에게 더 감정 이입이 되는 걸 보니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박국제 대표는 시종일관 무능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조롱당하고 뒷담화만 까이다가 신입 직원 한 명을 잘못 뽑은 탓에 전국구로 개망신을 당하고 회사도 망해버리고야 만다.

재벌집 아들이어서 취미로 회사를 하는 것 같진 않던데 어쩌면 감옥에 가거나 도망자 신세가 됐을 수도 있다. 결말이 의외였던 게 시종일관 티격태격했던 박국제 대표와 직원들이 결국엔 화해를 하거나 서로를 이해하는 것 까진 아니더라도 조금은 가까워지면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냥 회사는 망해버리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끝난다. 박국제는 비록 무능하고 무례하고 눈치도 없는 주제에 회사를 차리고 직원들에게 월급을 준 중죄인이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거나 그 어떤 피치 못할 사연 같은 게 드러나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무능하고 무례하고 눈치도 없고 여자 친구조차 없는 중년 아재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에서 멈춰버릴 줄은 몰랐다. 김다정 주임을 비롯한 직원들이야 아직 젊으니 어떻게든 재취업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중년을 훌쩍 넘겨 백수가 된 박국제 대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한낮의 도서관

 


점심을 먹고 날씨가 좋아서 도서관에 들렀다.


도서관은 회사에서 빠른 걸음으로는 30분 정도 느린 걸음으로는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있는데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봄기운을 만끽하며 걸어갔다왔다. 업무시간 중이었지만 요즘엔 사무실에 일찍 들어가나 한참을 놀다 늦게 들어가나 별 차이가 없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예전부터 없었다. 게다가 6년째 아니 7년째 각색 중인 작품도 진행이 중단된 터라 그나마 일하는 척 할 꺼리조차 줄어들어버렸다. 답답하다. 아마 대표님도 답답할 것이다. 케이블 드라마가 잘 진행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평일 대낮의 도서관이지만 이용객들이 득실거려 빈자리는 없다. 다들 자리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펴고 뭔가 열심히 읽고 쓰고 있는데 무슨 공부를 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공무원 시험 준비 같기도 하고 고시 준비 같기도 한데 왠지 한심해보인다. 아마 여기 있는 이용객들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한심하게 볼 것이다.


나는 곧장 소설 칸으로 가서 소설책들을 열심히 뒤적거렸다. 대부분 읽어본 책들이지만 습관적으로 한번씩은 뒤적거리게 된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소설책들을 이리 저리 뒤적거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소설책이나 뒤적이고 있으니 한심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의 시선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발 겉모습만 보고 한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쯤은 무슨 일 하시는 분인데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소설책들이나 뒤적거리고 있냐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만약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나에게 무슨 일 하시는 분인데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소설책들이나 뒤적거리고 계시냐고 물어봐주면 나는 백수나 공무원 시험 준비생 또는 고시생은 아니고 사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제작할 영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자료 조사차원에서 도서관에 왔다고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할 것이다. 겉모습만 보고 백수인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아마도 앞으로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란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내가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친한 연예인이 누군지 신기한 듯 물어볼 것이다. 곧이 곧대로 내가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자기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할 것이고 자연스레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환상도 깨질테니 그냥 누구나 알만한 영화들의 제목을 얘기해줄 것이다. 친한 연예인도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그게 누구냐고 물어볼테니 대충 누구나 알만한데 탑스타는 아닌 정도의 연예인 이름을 얘기해 줄 것이다. 이 정도면 제법 그럴 듯할 것이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면 더 이상은 차가운 시선으로 무시하듯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다만 알고보니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매주 필름2.0과 씨네21을 꼼꼼히 읽고 스폰지 회원이고 듀나 영화 게시판에도 자주 들락날락거리고 부산 영화제도 매년 참석하고 한겨레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영화 강좌도 몇 번 들은 경력이 있는 A+급 영화 매니아라면 어설픈 뻥은 금물이다. 뻥치다 들키면 쪽팔려서 이 도서관엔 다시 오지 못한다.


그 때 대표님에게 전화가 왔다. 마침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나로부터 1.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소설 책들을 정리 중이었다. 바로 이때다 싶어 핸드폰을 꺼내들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감독이 어떻고 작가가 어떻고 시나리오가 어떻고 등등 뭔가 심각한 척 하는 표정으로 업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소설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여기는 도서관이니 핸드폰을 끄라고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셨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곧장 핸드폰을 끄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도서관에 올 때처럼 50분 동안 천천히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그래도 업무시간에 너무 자리를 비우는 건 대표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버스를 탔다. 버스로는 도서관에서 사무실까지 10분 정도 걸렸다.

덧글

  •  술과고기 2008/04/12 02:00 # 삭제 답글

    그나저나 트윈스의 저 걸은 누구인걸까요...(지난번 부터 물어보고 싶었습니다.ㅎㅎ)
  •  자오 2008/04/12 02:00 # 삭제 답글

    오늘도 재밌게 읽었어요. 애드맨님의 글은 왠지 체념적이면서도 해학적이라 좋네요@
  •  나도 영화인 2008/04/12 02:05 # 삭제 답글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게... 이런 글 재미있게 쓸 궁리하고 있을 때 이런 문체로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쓰는 게 어때요? 이런 글 써봤자 딸딸이잖아요. 딸딸이 치는 거 많은 사람들이 보면 기분 좋아요? 영화도 딸딸이잖아요. 영화를 해주셨음 해요, 푸념조의 글 말고. 결국 주목을 받고 싶은 거 밖에 안되잖아요? 님만 망해가는 영화사 다니나요. 안망해가는, 안힘든 영화사는 도대체 어딨길래요?
  •  나도영화인2 2008/04/12 02:13 # 삭제 답글

    동감이에요. 뭘 쓸지 진짜 기대>우려 됩니다 ^^
  •  달콤베이비 2008/04/12 03:51 # 삭제 답글

    나도영화인들/
    이렇게 재밌게 글 쓰는 사람도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썪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몸소 실천해 주시고 있잖아요...
    결국 이 블로그 자체가 한국 영화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메타 블로그네요.. 허걱..
    작가가 없다 없다 그러는데 없는 게 아니에요.
    실력자들이 지천에 깔렸죠.
    다만 바로 옆에 있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뿐...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애드맨님이 겪어 온 수난은 다들 아시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애드맨님도 회사에선 메이드 될 가능성 없는 아이템만 제출하는 기획실 직원일 뿐이죠.
    분명 그 아이템들도 이 블로그만큼 재미있었을 겁니다.
    다만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일개 기획팀 직원이 내 놓은 아이템이기에 각 단락별로 대충 한 줄 씩만 읽고 폐기 처분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 바닥이 만만한 곳은 아닌 거 같아요-_-


  •  나는 관객인 2008/04/12 09:11 # 삭제 답글

    나는 한국영화보다 애드맨님 블로그가 더 재밌음. 애드맨님이 악플에 상처받고 블로깅 관둠 책임질거삼?
  •  재밌어요ㅋ 2008/04/12 09:43 # 삭제 답글

    저번에 낯선 여자편에 이어서 오늘 또 실컷 웃었습니다ㅋㅋㅋㅋ
    http://adman.egloos.com/992071
  •  달빛이야기 2008/04/12 11:08 # 삭제 답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그릇 2008/04/12 14:28 # 삭제 답글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사서 2008/04/12 15:38 # 삭제 답글

    아까부터 남미문학 서가 쪽에서 어떤 남자가 자꾸 이쪽을 흘끗흘끗 쳐다본다.
    올 들어서만 보르헤스책이 세권이나 사라졌던데..
    실장님도 눈치가 이상하셨는지 나보고 책수레라도 끌고가서 감시 하라신다.
    내가 아무리 막내라지만, 아직 점심먹은 배도 않꺼졌는데.. 제길..

    그런데 이 남자 정체가 뭐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하기 시작한다.
    자료가 어떻고, 시나리오가 어떻고.. 과장된 목소리에 심각한 표정까지.. 왠지 내가 들으라고 연기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도 어설프게...
    한참을 그렇게 혼자(?) 떠들던 남자는 핸드폰을 끄라는 내 주의를 받고서야 만족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도저히 못참겠다.. 내일은 꽃구경이라도 가야지..
  •  핀치히터 2008/04/12 15:41 # 삭제 답글

    아 놔 ㅋㅋ 글도 웃기지만 리플도 웃기네요. 진짜 악플에 상처받아서 애드맨님이 블로그 관두시면 누가 책임지나요 ㅋㅋ 전 애드맨님 글도 좋지만 만화도 좋아해요~ 종종 올려주세요 ^^
  •  애드맨 2008/04/12 18:39 # 수정 삭제 답글

    술과고기님 // 저도 잘 모르는 언니에요~ㅋ 그냥 방망이 들고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요.

    자오님 // 체념은 전공인데 해학은 과찬이셔요 ㅎ;;

    나도 영화인님 // 시나리오도 쓰고는 있습니다. 부끄럽네요;;

    나도 영화인2님 // 기대>우려 해주세요 ㅎㅎ

    krzys님 // 반갑습니다 ^^~~

    나는 관객인님 // 블로그 안 관둘께요ㅎㅎ

    재밌어요님 // 기억력이 좋으셔요 ^^

    달빛이야기님 // ^^~~

    그릇님 // 좋은 시 감사합니다.

    사서님 // 다 들어주셨군요. 다음 만남이 기대됩니다 ^^~~

    핀치히터님 // 요즘 그림체를 다듬고 있습니다. 종종 올리겠습니다 ^^
  •  라엘 2008/04/12 20:54 # 삭제 답글

    ... 우와. 진짜. 애드맨님!

    그리고, 다른 리플러님들도!

    최곱니다!
  •  구들장군 2008/04/13 10:18 # 삭제 답글

    다른 영화인들 보시기엔 어떨지 몰라도, 영화에는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들에겐 애드맨님 이글루가 참 재미있는 곳입니다.
  •  다른 영화인 2008/04/13 17:18 # 삭제 답글

    영화인이 봐도 재미있는 곳입니다 ^^
  •  비타민 2008/04/14 09:57 # 삭제 답글

    핸드폰 끄라고 다가온 거 였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중략'편과 같은 로맨스를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  노란싹수 2008/04/14 12:36 # 삭제 답글

    올 때마다 즐거운 블로그. 님 좀 짱인듯. ㅋㅋ
  •  아무개 2008/04/15 17:27 # 삭제 답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많은 청춘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공부하다가
    배가고파 집에와서 혼자 떡볶이를 끓여먹으며 유재석의 놀러와를 낄낄대며 본 후
    앤잇굿에 들어와서 글을 읽다보니 한컷 정도에 제가 출현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이렇게 댓글을 남기면서 킥킥대는 제 자신이 약간은 한심스럽긴 하지만
    한심한 사람들이 도서관에 가면 저말고도 많으니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재밌는글 많이 올려주세요

    영화과 졸업하고 영화판을 보니 한심해서 도서관에서 한심스러운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1인
    저도 시나리오는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  reposenap 2008/04/25 00:56 # 삭제 답글

    엥... 전 몇 년째 부모님 돈 받아 써서 고시공부나 하는 그런 사람들 얘기를 잘 몰라서 그런지, 그냥 도서관에서 공부들 하는 모습 보면 공부들 참 열심히 하는구나, 싶던데 ^^;;
    저처럼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 사람들 중엔 똑같이 부모님 돈 타서 쓰더라도 학생 신분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가 그냥 백수일 때보다 가오가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ㅎㅎ;
  •  에로거북이 2008/05/30 11:56 # 삭제 답글


    .... 백수생활을 6개월째 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

    어이없게 원하지 않게 상황이 사람을 일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정신적 황폐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p.s. 정독도서관 보단 명동의 커피빈이 책읽기는 더 좋았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까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퇴사했다.


최근 근무 태도를 보아하니 이번 달을 넘기긴 힘들겠다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퇴사한다고 하니 있을 때 좀 더 잘해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은 들었다. 그동안 내가 뭘 잘해줬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잘 해준 게 없어서 술이라도 한 잔 사야 될 것 같았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지만 사람일이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거고 만약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망해가는 영화사 퇴사 후 우여곡절 끝에 아주 아주 거물이 되고 나면 그땐 술을 사주기는커녕 전화 통화조차 못할 수도 있다.


망해가는 영화사를 그만두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로또를 한 장 샀는데 덜컥 당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로또 당첨금으로 영화에 투자할 가능성도 없진 않고 그 때가 되면 자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한테 잘해준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해서 지금 미리 술이라도 한 잔 사주면 나중에 설마 모른 척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솔직히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뭔가를 해 보려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어쩔 땐 한심하고 미련해보이기도 했는데 아마 본인에게도 힘들고 답답하고 안쓰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들 말은 번지르르 잘 하는데 실제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한국 영화계의 절대 불황으로 망해가는 영화사와 비교당하면 화 낼지도 모르는 메이저 영화사마저 위태롭다고 하니 망해가는 영화사의 사정은 굳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술이 좀 들어가고 나자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조금은 원망스럽다는 듯 왜 옛날에 자기가 추천한 원작 아이템을 무시했냐고 따지듯이 물어왔다. 참고로 얼마 전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모 외주 제작사에서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자기가 하자는 대로만 했으면 우리도 그 외주 제작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겠냐며 나를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는 작품을 보는 안목만큼은 메이저 외주 프로덕션 수준이지만 망해가는 영화사에 들어온게 실수고 설상가상으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는 팀장을 만나서 능력 발휘를 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쯤 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배웠기 때문이다.


나도 옛날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지금 나에게 하는 원망섞인 한탄을 다른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나의 한탄을 한참 들으시더니 <설득도 능력이다>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주셨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여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설득도 능력이다. 단순히 추천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누군들 영화를 못 만들겠는가.


그래서 나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에게 <설득도 능력이다>라고 말 해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지하철 끊길 시간됐다며 일어나겠다고 했다. 이대로 집에 보내기는 조금 미안해서 술집 옆의 편의점에서 커피 우유 한잔을 사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설득도 능력이라는 말은 괜히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왕 잘해주는 거 끝까지 잘 해주는 건데 성질머리하고는...

 

덧글

  •  동사서독 2008/04/11 00:49 # 삭제 답글

    로또 당첨금이 요즘 많지 않아서 영화에 투자하시는 것은 말리고 싶습니다. (엉?)
  •  비타민 2008/04/11 01:04 # 삭제 답글

    엔딩이 너무 슬프군요... 커피 우유 한 잔과 멀어지는 뒷모습이라니... ㅠㅠ
  •  가장나이가많은인턴 2008/04/11 01:04 # 삭제 답글

    메롱
  •  술과고기 2008/04/11 08:16 # 삭제 답글

    그 정도면 그래도 잘 해주신거죠.
  •  Labyrins 2008/04/11 08:56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다...좋은 말이네요.
    어쩌면 사회생활 하면서 자신의 역량보다 더 중요한게 말하고 설득하는 능력 같습니다.
  •  Lohengrin 2008/04/11 09:03 # 삭제 답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분도 그로인해 뭔가 배우지 않았을까요
  •  지랄오발탄 2008/04/11 09:09 # 삭제 답글

    어째 점점...
  •  정시퇴근 2008/04/11 10:15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긴 합니다만... 좀 씁쓸한 것이 "억울하면 성공해라"와 똑같은 말처럼 들려서 좀 마음이 그렇네요..ㅎㅎ
  •  케야르캐쳐 2008/04/11 12:25 # 삭제 답글

    정시퇴근 님의 덧글이.. 참........ 동감입니다.
  •  나는나야 2008/04/11 17:41 # 삭제 답글

    유심초 노래 가사네요 ^^
  •  심연 2008/04/11 19:26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고,
    줄 잘 서는 것도 능력이고,
    부모 잘난 것도 능력이고,
    머피보다 샐리하고 친한 것도 능력이고,
    망하지 않을 회사 찾아가는 것도 능력인 듯 합니다...

    그나저나 좀 씁쓸한 글이네요....
  •  라엘 2008/04/12 20:58 # 삭제 답글

    요새는 글속 등장인물들이 자주 나타나서 리플을 다네요. ^-^

    에휴... 설득도 능력 맞고요, 잘난 부모님 만나는 것도 지 능력이고요... 저는 파릇파릇한 이십대 초반에 존경하옵는 어느 편집장님께서 그 말씀 해주셨어요. 저 역시 반박할 말이 없더라구요. 심연님의 말, 나이들수록 정답이에요. 흑흑흑.
  •  은재 2008/04/13 01:23 # 삭제 답글

    월욜날 대표랑 미팅있는데.
    '설득'....잘해야 되는데.
    ㅡ,ㅡ;
  •  글로리ㅡ3ㅢv 2008/04/30 01:06 # 삭제 답글

    어떤 분야에서나 비슷한 후회, 원망을 하게 되는것 같군요. 설득이 능력이라면 좋은 소리를 담아 실행에 옮길수 있게 밀어주는 것도 또한 윗사람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상황이 어찌되었든 다른 대안이 없을 때는 가까운 사람,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충고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자칫 '니가 뭔데', '너 보다는 내가 더 잘안다' 라는 선입견으로 무시할 때가 많았습니다.
    귀가 너무 얇아서 여기저기에 흩날리는 사람도 문제지만 고집으로 똘똘 뭉쳐서 자신에게 맞는 소리만 골라 들으려는 덜깨인 사람들이 많을 수록 프로젝트와 그 성과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더군요. 고집과 신념의 사이에서 사람과 일을 동시에 재단해야 되는 중용의 도를 일찍 깨우치지 못한게 저는 후회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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