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제작이 중단된 영화의 편집회의가 있었다.
잘하면 적은 금액이나마 제작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남은 촬영 분량 중 안 찍어도 될 부분을 결정해서 꼭 필요한 장면만 찍는 방법으로 최대한 적은 제작비로 촬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회의였다.
아직 제작비를 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작비를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가정 하에 진행된 회의라 솔직히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대표의 말에 의하면 제작비를 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지만 대표를 믿는 직원보다 대표를 믿지 않는 직원들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은 <과연 제작비를 구할 수 있을까?>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마무리하고 개봉을 하면 백만, 이백만 어쩌면 천만 관객돌파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망해가는 영화사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에 일단 회의는 진행됐다.
문제는 촬영을 안 해도 될 장면을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느냐인데 직원들 모두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각각의 다른 의견들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회의는 짧게 하고 결과는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던데 아무런 결론없이 늘어지기만 했고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갖고 또다시 회의가 이어지자 모두들 아이디어도 떨어지고 할 말도 없어졌는지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뜬구름 잡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도 같이 뜬구름 잡았던 직원들 중 일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 다 바보고 나만 똑똑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 이런 지리한 회의를 명쾌하게 끝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똑똑하고 오죽 말들을 잘해서 말만으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나중엔 다들 지쳐서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하나 둘 씩 회의실에서 슬금 슬금 빠져나갔고 남은 이들은 그래 그럼 니 말도 맞고 내 말도 맞으니까 하여간 제작비 구해지면 다시 얘기해보자고 다음 회의를 기약하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회의가 끝나기 전 누군가가 다른 영화사를 예로 들며 돈이 없어서 촬영이 중단됐지만 대표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 강한 영화사 직원들이 개인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아 제작비를 모아 촬영을 마무리 한 적이 있다고 우리도 그런 식의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지금 저 사람이 제정신인가 궁금했다. 낮술 마셨나 싶었는데 발음은 분명했고 술냄새도 나지 않았다.
의외로 그 제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직원이 있어 놀랐는데 만약 이 영화가 우여곡절 개봉해서 천만 관객을 돌파해 엄청난 수익률을 안겨준다면 개인 돈 투자한 직원들은 돈도 벌고 대표의 사랑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나는 생각없다.
덧글
Labyrins 2007/10/31 10:22 # 답글
흠...현금서비스까지 받아서 제작비를 충당한다....
어떻게 보면 좀 무서운 생각이네요- 어쨌든 실제 현금서비스로 제작비를 충당했던 영화가 있단 얘기죠? -_-;;;
진짜 무섭네요. - 영화사대표-직원의 갑을 관계에서
투자자-영화사대표의 갑을 관계로 바뀌는 거네요-_- 지나가다.. 2007/10/31 15:46 # 삭제 답글
영화 제작투자배급사 쇼이스트의 김동주(40) 대표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코리아픽쳐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새로 쇼이스트를 차린 2003년 초. 그러나 창립작품인 '올드보이'에 아무도 투자를 하려하지 않았다. 하루 제작비용 700만원은 직원들이 카드 현금서비스로 충당해갔다.- 순간적으로 잭팟을 꿈꾸며 팔에 쥐나게 슬롯머신 돌리는 아저씨의 생생한 영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가서...
- 최근 도래미파솔라시도도 그렇게 중단되었다 그렇게 무사히 크랭크업했죠..,
- 현금서비스...이건 정말 모 아니면 도의 게임이네요. 저라면 하지 않아요. ;;; 하지 않고 나중에 후회할래요.
- 최근 식객도 그렇게 중단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죠.
- 누군가를 믿는다해도 그런건 위험;;
- 만나뵙고 좋은 정보 드리고자 합니다. 저한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matrose4ever~골뱅이~개이버. - 魔刀露手님 //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 음 올드보이라.... 대박이었네요...
그당시 현금인출하신분들은 명예와 부, 모두 거머 지셨겠군요...
근데 영화판이 무섭긴하네요... 박찬욱감독이 복수는나의것으로 심하게 말아드셨긴 하나
올드보이가 자금이 없어서 직원들이 현금인출했다니...
그러나 문제는 애드맨님 회사가 만드는 작품이 올드보이처럼 대박칠수 있느냐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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