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중략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가 꼭 회사 분위기 같아서 술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메신저에서 자기 연애는 왜 이 모양이냐며 한탄하던 소개녀의 마음이 나와 같길래 일찌감치 퇴근해서 술집으로 갔다.


처음엔 시시껄렁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영화 관련 정보와 루머를 교환하다 잠시 후 왜 남자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기를 차버린 남자들에게 맺힌게 많았는지 소주 두병째부터 커다란 두 눈에 이슬같은 눈물이 흐르지는 않고 글썽글썽 고이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 주위엔 참 못된 남자들이 많았는데 나에게는 그들에게 돌멩이를 던질 자격이 없어서 마냥 맞장구를 쳐주진 못했다. 그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최대한 성심성의껏 위로의 멘트를 날리며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지만 먹튀사고까지 기록된 소개녀의 S다이어리 앞에서는 딱히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소개녀의 장점을 칭찬해주고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사람 만날거라고 뻔하고 식상한 덕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묵묵히 내 덕담을 듣고 있던 소개녀는 글썽이던 눈물을 닦고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만약 자기가 대쉬하거나 유혹하면 받아줄거냐고 물어왔다.


나의 뻔하고 식상한 덕담의 진정성을 테스트하는 것 같아 이왕하는거 제대로 하려고 만약 그래만 준다면 가문의 영광이니 당연히 받아주겠다고 맞받아쳐주었다. 정답이었을까? 소개녀는 기분이 풀렸는지 호호 웃으며 잠깐만 하고는 화장실에 가 버렸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술을 퍼마셔댔고 나는 바보같고 어처구니없는 나의 과거사를 술안주로 제공했다.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져서 우리는 소주 두병 정도를 추가로 마셔버렸다.


계산은 내가 했는데 카드를 긁는 순간 날카로운 뭔가에 가슴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너무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 책임 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소개녀는 비틀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해 결국 택시로 동네까지 데려다주었다. 소개녀는 택시에서 내린 다음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비틀거리기만 해서 아예 집까지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았는데 나는 소개녀의 집을 몰랐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상가 건물 입구에 주저앉은 소개녀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고 잠깐만 어디 들어가서 쉬었다 가자고 제안했다. 마침 근처에 쉬었다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눈에 보였다. 여기서 쉬었다 가려면 또 얼마를 긁어야하나 싶어 슬퍼졌는데 소개녀가 살포시 현금을 쥐어주었다.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중략......


걸을 수 있을만큼 정신을 차린 소개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후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원룸에서 혼자 사는 소개녀는 먹튀사고 이후로 절대로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빗물에 젖은 신발과 양말이 찝찝했던 나는 빨리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택시 안에서 심야 할증 요금 올라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무심코 긁어버린 술값까지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일들이 좋은 추억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주었다.


벌써 금요일. 다음주는 11월. 아아.

내 인생의 2007년을 누군가에게 중략당한 기분이다.

덧글

  •  그때그넘 2007/10/26 03:57 # 삭제 답글

    웹에서 바탕체를 쓸 줄 아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고 그냥 누군가 한 말이 기억나네요. ^^
  •  울트라맨 2007/10/26 08:06 # 삭제 답글

    중략부분을 번외편이나 외전으로 공개하실 계획은..-_-;;
  •  dARTH jADE 2007/10/26 09:00 # 답글

    저도 어제 맥주가 매우 간절했는데, 집에 오니 냉장고 문을 열 기운도 없더군요. 아침에 일어나니 비도 오지 않는데 다시 생각납니다
  •  2007/10/26 09: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오사쯔 2007/10/26 10:43 # 삭제 답글

    "비공식업무일지"를 영화화 하면 어떨까요?
    실화를 바탕으로한.....제목도 참 좋네요.
  •  타선생 2007/10/26 10:56 # 삭제 답글

    잘 보고 있읍니다.
  •  아카식 2007/10/26 12:20 # 답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  유니마르 2007/10/26 13:05 # 삭제 답글

    저도 영화사에서 근무하고 네이버에서 블로그도 운영하는데
    비공식업무일지~ 영화사 직원으로서 정말 공감가고 재미있는 글이네요. ^^
    저는 망해가는 영화사는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로 업무나 라이프에 있어
    애드맨님과 비슷한 것들이 많아 비공식업무일지 거의 집중, 몰입해서
    열심히 읽었네요.
    우연히 들어왔지만 자주자주 놀러오겠습니다.
  •  검은머리요다 2007/10/26 21:54 # 답글

    음.. 중략을 하니 오히려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어땠을까..하고요.

    그리고 참 요샌 애드센스 안하세요? 저는 한번 달아볼까하는데..
  •  앵벌천국 2007/10/27 00:29 # 답글

    중략...부럽습니다 ( __)
  •  애드맨 2007/10/27 00:53 # 답글

    그때그넘님 // 누굴까요?ㅎ
    울트라맨 // 글쎄요;;
    dARTH jADE님 // 아침에 맥주 좋죠.
    비공개님 // 누구에게나 맞는 얘기 같아요.
    오사쯔님 // 음...글쎄요;;ㅋ
    타선생님 //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아카식님 // 넵^^
    유니마르님 // 음 왠지 뜨금하네요. 저도 놀러가겠습니다.
    검은머리요다님 // 티스토리 미러블로그에는 계속 달려있습니다. 방치 수준이죠ㅎ. 이글루에는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애드센스를 달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앵벌천국님 // 글쎄요;;;
  •  라엘 2007/10/27 15:06 # 답글

    중략! 어디갔습니까!!!!!!!!
  •  아슈 2007/10/28 01:18 # 답글

    회사에서 집중이 안될때마다 조금씩 읽곤 했는데 (장문 스타일의 글이라 머리 정리할 땐 도움도 많이 되고;; 왠지 동병상련도 느껴져서) 다음페이지를 눌러놓고 로딩하는 동안 또 알탭해서 워드를 치는 그런 작업들을 하던 도중....진중권씨-디워 얘기 읽다가 다음페이지 누른 상태에서.. 초난감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애드맨 2007/10/28 01:44 # 답글

    라엘님 // 잘 있습니다 ㅎ
    아슈님 // 죄송합니다;;;;;
  •  검은머리요다 2007/10/28 12:41 # 답글

    아.. 그렇군요. 어쩐지 다른 포털 블로그 같은데는 많이 달려있던에 이글루스에는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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