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출근포기

 


출근을 포기했다.


출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통보까지 받은 마당에 꼬박 꼬박 출근해서 할 일도 없이 회사에서 주는 점심이나 먹고 만화책, 소설책 뒤적이고 미드나 일드를 교대로 감상하며 저녁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도 못할 짓인 것 같아 깔끔하게 포기해버렸다. 


마케팅팀에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영화사에서 작품을 준비 중인 아는 형은 능력있는 직원이 오래 버티는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직원이 능력있는 거라며 알아서 출근을 포기하는 건 밀린급여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다른 직원들은 다 가만 있는데 너 혼자 출근을 포기하는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조언했다. 나는 떠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겠냐고 반문했는데 알아서 회사에 안나타나주면 적어도 한 명은 고마워할거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대로 출근을 포기하고 얼마 뒤 다른 회사에 들어간다고 가정을 해봤다. 몇 년이 지나고 때는 20xx년. 장소는 대한민국 서울. 더 이상 어린 나이는 아니다. 나는 몇년간 작은 영화사에서 경리와 배급을 제외한 기획과 제작 업무를 대강 해봤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평온하게 보내던 일상이 스크린쿼터 대폭 축소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인 불황으로 인한 영화사의 도산으로 갑자기 깨져버린다. 당장 다음달 카드값을 낼 돈도 없다.


또 다시 윗사람에게 출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통보를 받고 회사 사장과는 소원해지고 직원들은 뿔뿔이 제 살길 찾아 흩어진다. 나는 내가 기획했던 작품에 엮인 사람들로부터 밀려드는 불평과 원망을 한 건씩 정리하고, 나를 믿고 따라온 후배들은 아는 회사에 소개해준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만 혼자 남는다.


도저히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닐 기운은 없고 취직할 자리도 마땅치 않다. 어떻게 해야 먹고살 수는 있을까 고민을 해보지만 답은 없다. 친분이 있던 작가들마저 영화사와의 끈이 떨어진 영화사 직원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몇 달 뒤 실업급여도 끊긴다. 회사를 다니며 들고 있던 아이템을 뒤적여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법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이 시나리오로 뭔가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한다.


아직 메이저 배급사와 거래를 할 수는 없지만 잘만 만든다면 소규모 개봉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 일단 영화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감독은 평소 친분이 있던 아무개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망상에 빠져 영화사를 창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하고 개봉을 시킨다.


문제는 죽음의 계곡이다.


벤처(venture) 기업으로 보면, 설립 이후 아는 사람들의 돈을 다 끌어대 기술개발도 하고 마케팅도 한다고 설쳐 봤지만 자본금이 잠식되고 매출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고 한다는데 영화는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만들 수는 있고 홍보만 잘하면 언론에도 오르내릴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죽음의 계곡을 절대적으로 피할 수 있는 묘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단순히 좋은 아이템이라는 주관적이고 막연한 판단으로는 일은 추진되지 않는다.


이제 출근할 필요도 없으니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요즘 유행이라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칩거에 들어간 후 일체의 외부출입을 자제한 채 장고를 거듭해봐야겠다.

덧글

  •  acid 2007/11/12 18:13 # 삭제 답글

    힘내시구요. ...어떻게든 한 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  근데그년 2007/11/12 18:16 # 삭제 답글

    근데 이거 다 실화야?
  •  라엘 2007/11/12 18:32 # 삭제 답글 비공개

    어. 안되는데. 월급 받을 때까지는 무조건 출근하세요!!!!! ㅜㅅㅜ 우흑흑. 눈에 띄는 직원부터 밀린 월급 준다구요... 우흑흑.
  •  dARTH jADE 2007/11/12 19:15 # 삭제 답글 비공개

    힘내세요, 기회가 된다면 강남역 근처에서 맥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  이적 2007/11/12 19:59 # 삭제 답글

    달리 해드릴 말이 없군요.
    힘내십시요....
  •  이방인 2007/11/12 20:07 # 삭제 답글

    아아 이런...
  •  푸른 2007/11/12 20:36 # 삭제 답글 비공개

    이왕 칩거 결심하신거 내년 2월쯤에 있다는 시나료 공모전 한 번 내 보세요.
    힘내세요.
    그래도 여러 모로보나 상황이 저보단 낫네요.
    ^*^
  •  로로보 2007/11/12 22:52 # 삭제 답글

    힘내시길 바랍니다...
  •  마리 2007/11/12 23:56 # 삭제 답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  동병상련 2007/11/13 10:09 # 삭제 답글

    비슷한 처지인데, 저도 기획을 맡아 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사는 기획쪽과 관리업무를
    같이 맡아서 해달라고 합니다. 이런....
    나가라고 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인가여?
    아님 나가르는 간접적인 사인인데 눈치없이 있는건가여?
    아직 관리일을 하겠다고 말은 않했는데 참 좌불안석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