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대책회의

 


밀린 급여 문제에 대한 대책 회의가 있었다.

 

나처럼 출근을 포기한 직원들 위주로 모였는데 그중엔 밀린 급여 기다리느니 실업 급여 받는게 빠르겠다 싶어 아예 퇴직해버리고 실업 급여를 기다리는 직원도 있었다. (천잰데...?) 여전히 대표님을 믿고 있는 직급이 높은 직원들과 직급은 낮지만 대표님과 자신이 각별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직원은 대책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은 없고 대책 회의를 해도 별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오랜만에 정든 동료 직원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자리에 나갔다. 역시 대책 회의라고 해 봤자 별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으며 회포를 풀고 우애를 다질 수 있어 보람 있었다.


적당히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자 그동안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필요 이상으로 격식과 예의를 차렸는지 후회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허물 없어졌는데 아마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달리 보다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 자리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할 말이 없어지고 분위기가 썰렁해질 때마다 밀린 급여 얘기를 꺼내면 다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출세할 가망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사이가 좋은 법이라고 했던가. 같은 목적을 가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금방 친해지는 이유를 알았다. 그럼 회사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뭐였지?


다들 회사에서 나오려는 마당에 아무개 과장님 아무개 대리님하며 비슷한 나이였던 주제에 직급이 다르다고 서로 까칠하게 경어를 썼던 과거를 아쉬워하며 다들 말을 놓자고 합의를 봤는데 물론 그 와중에서도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직원도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어느 모임이든 똑같은 인간만 모여 있으면 재미가 없고 숨이 막힌다. 모두가 의기투합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싫은데? 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자리가 술도 더 맛있는 법이다.


술을 못 마시는 줄 알았던 직원들도 얼굴이 새빨게지도록 술을 마셨고 그동안 회사에서 했던 그 어느 회식보다도 분위기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대표님에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으며 이렇게 뒷담화로 끝내는게 아니라 조만간 단체로 대표님을 찾아가 어떻게든 결말을 짓겠다고 의기투합했다.


다른 팀 직원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솔직히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딱히 더 할 얘기도 없고 밀린 급여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는 걸 여러 루트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대표님과의 대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대책모임의 대장은 나의 얘기를 곰곰이 듣더니 내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어쨌든 찾아가기 전에 연락은 주겠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 1차 술값과 2차 술값의 반은 내가 냈다...ㅜㅜ;;;

p.s. 엠에센에 로그인해보니 대표님이 계셔서 신속하게 로그아웃했다.

덧글

  •  이적 2007/11/20 23:41 # 답글

    ....
    술자리엔 딱 지정됀 현금만 가져가야돼요.
    분위기에 휩쓸리면 지는 겁니다.-_-;
    어차피 남들도 술취해서 기억도 못해요.;;
  •  애드맨 2007/11/20 23:49 # 답글

    카드를 긁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나 싶었습니다.
  •  老姜君 2007/11/21 00:16 # 답글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에 반전을 끼워두시는군요?
  •  이방인 2007/11/21 00:24 # 답글

    카, 카드였군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