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혹평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몇 년전에 친구와 공동집필했다가 아무 소득없이 곱게 하드에 저장해둔 시나리오 한편을 현재 잘나가는 영화사 직원인 후배에게 보여주었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보는 눈도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메신저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얼마 뒤 후배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이 시나리오 누가 쓴거예요?>


시나리오에 내 이름이 적혀 있으면 정정당당한 모니터에 방해가 될까봐 시나리오를 보내기 전에 작가 이름을 다 지웠는데 다짜고짜 누가 썼는지부터 물어보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메신저를 오래 하다 보면 글자만 봐도 대충은 글쓴이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대충 그냥 아는 작가가 쓴건데 입봉도 못한 무명이어서 이름은 말해줘도 모를거라고 하자 그럴줄 알았다고 살다 살다 이렇게 여성비하적인 유머로 점철된 기분 나쁘고 더티한 시나리오는 처음 읽어본다고 불쾌해했다. 자기가 여자여서가 아니라 정말 심하게 짜증나고 시나리오 읽느라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고 억울해했다. 이거 읽느라 칼퇴근도 못했으니 나중에 저녁 한번 사내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만약 자기네 영화사에 이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아무도 안 보여주고 바로 이면지로 재활용하고 싶은 수준이라고 총평했다.


그나마 오빠가 보여주는 거니까 끝까지 읽었지 처음 세장 읽고부터는 정말 읽기 싫었다며 왜 이 작품이 쓰레기인지 조목조목 꼬치꼬치 따져가며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글쓴이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후배의 혹평을 가슴에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사실 몇 년 전에 시나리오를 돌릴 때도 다 한번씩 들었던 말이라서 새삼 충격적일건 없지만 세월이 흘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사람들이 나와 친구의 시나리오를 보는 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후배의 모니터를 듣는 내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는지 후배는 혹시 이 작품 오빠랑 관계된 작품 아니냐고 물어왔는데 나는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정정당당한 모니터를 듣고 싶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했고 후배도 나랑 관계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거 같아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몇 년 전에 친구와 함께 공동으로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후배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그 시나리오 비슷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친구와 쓰고 있다고 얘기해 준 기억이 나서 중간 부분을 읽을 때쯤 이 시나리오가 나랑 관계있는 시나리오라는 걸 눈치는 챘는데 직접 쓰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척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 나는 시나리오의 줄거리 정도만 구상했고 실제 집필은 거의 내 친구가 했다고 얘기해주었다. 후배는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고 오빠는 이런 시나리오 쓸 사람이 아니라며 이제 그만 퇴근한다고 로그아웃해버렸다.


친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팔아버리고 나니 조금 찝찝했다.


이제 강해져야할 때다.

덧글

  •  Vinci 2007/11/16 00:57 # 삭제 답글

    강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요.
  •  심리 2007/11/16 01:14 # 삭제 답글

    힘 내세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비평을 들은 작가는 어떤 점을 받아들이고 어떤 점을 안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네요. 그 판단을 잘 해야 작품이 성공할테니 말이예요. 작가나 감독님들은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텐데 어떻게 버티시나 몰라요...... ~_~ 가슴에 비수가 팍팍!
  •  카델 2007/11/16 01:22 # 삭제 답글

    ....힘내세요!
  •  RIRUKA 2007/11/16 07:23 # 삭제 답글

    음, 저도 얼마전에 소속사 그만뒀습니다.
    사세가 많이 기울기도 했고, 불미스러운 일도 생기고 해서 큰맘 좀 먹었습니다.
    그동안 일하면서 얻은 명함들을 대표가 다 뺏어가더군요;;;
    뭐랄까,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분 나빴습니다.

    일단 연예인 연락처 파일을 빼돌려놓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유치하군요.
    내가 이 연락처를 다시 이용할 일이 있기나 할까요

    이젠 연예계라면 신물이 납니다.
  •  이방인 2007/11/16 07:43 # 삭제 답글

    끄응.
  •  firetiger 2007/11/16 11:40 # 삭제 답글

    흠..
  •  마리 2007/11/17 00:15 # 삭제 답글

    저도...옛날에 책을 쓴 적이 있는데 당시는 좀 멋있어 보이려고 필명을 썼지만,
    그 책을 읽은 지인이 혹평을 쏟아내어 필명을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책 사실은 내가 쓴 거라고 하자 그 때 흘렀던 민망한 분위기란 정말...
  •  라엘 2007/11/17 19:25 # 삭제 답글

    칭찬 받을 땐 밝히고, 칭찬이 아닐 땐 절대 잡아떼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은 혹평들은 다 맞는 말입니다. 정진하는 수 밖에 없지요. ^^
  •  검은머리요다 2007/11/20 10:40 # 삭제 답글

    아이구.. 어쩝니까.....
  •  지나가는 2007/11/21 17:24 # 삭제 답글

    태그에

    이면지....

    힘내세요;
  •  장비맨 2007/12/26 10:39 # 삭제 답글

    애드맨 님께 실례가 안된다면. 부탁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제가 쓴 시나리오입니다.
    http://blog.naver.com/k1park/80046329178

    시간이 되실 때 한 본 읽어봐 주시고.
    간단한 평도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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