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재택근무

 


태양이 저물기 시작하는 
남들 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늦은 오후. 나는 재택근무 중이다.


출퇴근 시절에는 당연히 매일처럼 봐왔던 내 옆자리의 둘째 언니와 맏언니, 맞은편의 새침떼기와 러시아 모델, 그 뒤쪽의 윤진서와 이쁜이 그리고 유학파 꽃미남, 제시카 알바, 근육질 꽃미남, 피부미녀 들을 더 이상은 매일 볼 수 없다.


이제 좀 친해진다 싶었는데 비슷한 나이끼리 반말 한번 편히 못 해보고 헤어지게 되다니 있을때 좀 더 잘 해줄걸 그랬다. 출근할때 <안녕하세요?> 먼저 퇴근할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점심 때 <잘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등의 그냥 하는 인사도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점심을 어느 식당에서 먹을지에 대한 고민도 이제 안녕이다.


비록 돈이 없어 사무실에서 음식을 시켜먹었던 조촐한 작년 송년회 때만 해도 음식들은 식어서 맛이 없었지만 내년엔 모든 일이 다 잘될거라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희망에 가득 차서 헤어졌던 기억이 나는데 그날 이후 결국 1년을 못 넘겼다. 그날 누군가 다른 영화사 얘기를 하며 회사가 망하는데 보통 1년이 걸린다는 말을 했었는데 우리 회사 얘기가 되버렸다.


망년회를 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한다 해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 전원이 다 모이는건 회사가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보이고 다 모이자고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해도 막상 당일이 되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아마도 모두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선 다시 모여도 분위기가 썩 좋을 것 같진 않다.


경험상 영화를 한편 같이 했던 스텝과 다른 영화팀에서 다시 만나기도 쉽지는 않은데 우리 회사 직원들과 다른 회사에서 직원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더더욱 힘들 것 같다.


매일처럼 해오던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전화 받기, 잡상인 정중하게 내쫓기, 손님 커피 접대하기, 당번 정해 청소하기, 밥먹고 시시껄렁한 농담하기, 다음주 개봉 영화 흥행 순위 내기하기, 야근 안해도 되는데 저녁먹고 사무실에서 시간 죽이기, 사무실 근처로 놀러온 친구와 커피빈에서 잡담하기> 등의 소모성 잡일들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다만 내 청소 당번일이 몇일 남지 않았는데 나 대신 누가 청소를 하게 될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월급이 밀리고 퇴직금은 언감생심이고 회사가 망하게 생긴 마당에 청소 당번이 궁금한건 왜일까.


영화사에 다니면서 영화를 한편도 못 만든건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지만 <둘째언니의 뜬금없지만 호탕한 웃음소리, 맏언니의 살신성인 하이컨셉 개그, 새침떼기의 귀여운 불평불만, 러시아 모델의 우아한 워킹, 윤진서의 느린말투, 이쁜이와의 사내 메신저, 유학파 꽃미남과의 커피 한잔, 제시카 알바의 미모 구경, 근육질 꽃미남의 향수 냄새, 피부 미녀의 낭랑한 목소리> 들이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됐다니 기분이 좀 그렇고 왠지 싱숭생숭하다.


물론 메신저로 로그인해서 말을 걸면 대답이야 하겠지만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고개만 들면 볼 수 있고 심심할때면 사다리타서 떡볶이를 나눠먹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덧글

  •  울트라맨 2007/11/15 18:06 # 삭제 답글

    몸이 멀어진 만큼 마음이 더 가까워지시길 바랍니다..
  •  재택선배 2007/11/15 18:42 # 삭제 답글

    혼자 방에서 해지는 거 보면 조금 서럽죠.
  •  魔刀露手 2007/11/15 19:32 # 삭제 답글

    힘내세요. 근데 이전 치어걸이 더 예쁜 것 같네요. (SK)
  •  마리 2007/11/15 23:43 # 삭제 답글

    쓸쓸합니다.
  •  이방인 2007/11/16 00:31 # 삭제 답글

    음음.
  •  심리 2007/11/16 01:18 # 삭제 답글

    사업이나 인연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인연'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  라엘 2007/11/17 19:27 # 삭제 답글

    동고동락도 한 지붕 아래 있을 때 얘기죠. 다른 회사 다니면, 또 그 사람들이 내 사람되고 그런 거지요... 인생이 그런 거랍니다... 저도 수십번 겪은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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