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내부고발

 


나는 블로그로 내부고발을 하고 있는 걸까?


김용철 변호사의 기자회견을 보고 내부고발자에 흥미를 느껴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를 보았다. 다국적 거대 기업이자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로 묘사되는 담배 회사에서 해고된 러셀 크로우가 우여곡절 끝에 내부고발을 결심하고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나니 어째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아 등골이 오싹했다.


사실 얼마 전에 먼 친척 아니 먼 친구 중 하나가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어쩌구하는 블로그가 웃긴다고 나에게 제보한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스타 블로거도 아닌데 이렇게 블로그와 나의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물론 그 친구는 아직도 내가 이 블로그의 운영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니다. 어쩌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일이다.


블로그를 이용해 내부고발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망해가는 영화사의 정체가 알만한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나는 밀린 급여 몇백만원 받겠다고 몇달에 걸쳐 치밀하게 블로그를 운영해오다 결정적인 순간에 펑하고 터뜨릴 계획을 짤 정도로 주도면밀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자의든 타의든 블로그에 오는 평균 천여명의 방문객들이 망해가는 영화사의 밀린 급여에 대해 알고 있는 마당에 어느 날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영화사와 등장인물들의 실명이 공개된다면 내부고발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잘못하다간 블로그가 영화인 신문고 역할까지 할 수도 있겠다.


만약 내가 다른 영화사 대표라면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 일하며 회사가 망해가는 이야기를 익명으로 블로그에 끄적이다 들통나서 짤린 직원을 부하 직원으로 쓰고 싶지 않을 것 같고 다른 직원이 나도 모르게 우리 회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끄적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다. 만약 다른 직원이 나도 모르게 우리 회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끄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척 흥미진진해하고 즐기면서 구경할 것 같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친하게 지낼 것 같다.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망해가는 영화사의 제2, 제3의 애드맨이 망해가는 영화사의 히스토리를 개인 블로그에 조용히 적어내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직원들 대부분은 싸이월드만 하거나 블로그는 안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다른 직원들도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모르고 있을테니 피차 마찬가지다. 심심한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김용철 변호사는 다국적 거대 기업 삼성의 법무팀장으로 일하며 백억 먼저 챙기고 내부고발을 결심했지만 나는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영화인 중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중소 영화사 기획팀 직원으로 일하며 따로 챙겨둔 것도 없고 내부고발을 결심한다 해도 체불임금은 흔한 일이니 딱히 폭로할만한 껀수도 아니다.


아무개 영화사에서 급여를 안줘요 하고 폭로한다해도 사회적인 명분이나 개인적인 이익은 찌끄래기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에 영화사 이름이 폭로되는게 내부고발인가? 고민을 차분히 블로그에 적어놓고 보니 어째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역시 블로그는 담배만큼이나 정신 건강에 이롭다.

덧글

  •  老姜君 2007/11/10 23:20 # 삭제 답글

    마지막 한줄이 제대로 된 반전입니다?
  •  마력덩어리 2007/11/10 23:56 # 삭제 답글

    디지털세상을 산다는 것은?
  •  이방인 2007/11/11 00:56 # 삭제 답글

    ㅎㅎ 그래요. 따지고 보면 개인의 일상일 뿐이죠.
  •  마리 2007/11/11 04:38 # 삭제 답글

    와우,최근 글이 쭉쭉 올라오네요.
    제 경우는 아주 기분이 좋거나, 아주 기분이 나쁘거나,
    좀 극단적일 경우에 그러는 편인데 뭐 이건 상관 없는 얘기고,
    독자(?) 입장에서는 애드맨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저 반갑습니다...^^;;;
  •  2007/11/11 09:43 # 삭제 답글 비공개

    영화관계자가 영화를 다운받아 보았다..는 구절은 삭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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