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사주


잘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가 투자무산으로 사이가 흐지부지해진 감독님과 사주카페에 갔다.


한때 나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 꽤나 열심히 명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몇 달 정도 공부한 후 아무리 공부해도 나의 운명은 알 수 없을 것 같아 중도 포기했는데 그 이후로는 남한테 돈을 주고 점을 본 적은 없다. 명리학에 정통한건 아니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대충 점장이들이 어떤 식으로 점을 보는 지 알 것 같아 이런 얘기를 돈 주고 듣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며 투자 유치엔 실패했지만 원래 영화가 다 그런거 아니겠냐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격려해 주셨다. 비록 감독님이 격려는 해주셨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지가 않아 겉으로만 힘내는 척 하고 속으로는 계속 좌절했는데 감독님은 그런 나의 속마음을 눈치라도 채셨는지 우리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냐며 사주카페에 가자고 제안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초저녁부터 술 마시는 것도 한 두번이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따라가 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감독님의 사주를 봐주었다.


사주를 믿는 건 아니지만 헛소리라도 듣고 기분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연습장에 뭔가를 한참을 끄적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감독님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다. 감독님은 나름 재치를 발휘해 <알아맞춰보세요~> 라고 어울리지 않는 재롱을 떨었고 점장이 아저씨는 놀랍게도 혹시 연예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감독님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범상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맞춘게 신기해서 그렇다고 했고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점장이 아저씨는 감독님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면 본전은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으나 내년부터 향후 7년간은 무슨 일을 해도 쪽박이니 절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집에서 자숙하라고 했다. 나는 뭐 이런 점장이가 다 있나 싶어 당황스러웠데 감독님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사람 좋게 몇 번 웃으시더니 그럼 외국에 나가면 잘 풀리겠냐고 물어봤고 아저씨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냐고 대답했다. 아니 지금부터 7년이면 남자가 한 참 일할 나이인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게 말이 되냐고 의아해하는 감독님에게 점장이 아저씨는 그냥 팔자가 억쎄게 좋은 여자 만나는 수 밖에 없다는 말만 남기고 나에게 사주 안 볼 거냐고 물어왔다.


피 같은 돈 내고 악담만 들은 감독님의 억울한 표정을 보니 이 아저씨한테 사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알려줬다. 아저씨는 연습장에 또 뭔가를 한참을 적더니 인상을 찌푸리는게 아닌가.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내 팔자는...


.....중략.....


사주카페에서 나온 감독님은 머리가 아파서 술은 못 마시겠다고 미안하다며 집에 가버리셨다. 만약 점장이 아저씨 말대로 감독님이 향후 7년간은 안 풀리는 팔자라면 감독님과 함께 쓰는 시나리오도 최소 7년은 빛을 못 본다는 얘긴데 정말 생각만 해도 암울하다.


감독님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드리고 집에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한국 영화계는 향후 7년은 힘들 것 같다. 스크린쿼터가 폐지되려나...

사주를 보고나니 작년에 엎어진 오늘의 운세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덧글

  •  푸른 2007/11/30 22:16 # 삭제 답글 비공개

    그런 말에 너무 끌려다니지 마세요.
    글 읽고 한참 웃었습니다.

    저 또한 올초에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까지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모 점술가에게 점을 보았는데 그야말로 올해는 대박의 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이렇게 쪽박인 해는 처음이랍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쫙쫙 밀고 나가시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라요.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뭐든 하나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요.

    ^^
  •  이방인 2007/11/30 22:22 # 삭제 답글

    뭘요. 저는 평생동안 여자없이 혼자래던걸요. ㄲㄲ
  •  심리 2007/11/30 22:31 # 삭제 답글

    무섭네요;;;;;;;;;;;; 어디 겁나서 사주 한 번 보겠습니까. 저도 물론 믿지는 않습니다만. 이건 거의 저주군요.

    그런데 그 점 보시는 분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아시나봅니다.
    사실, 이름 난 점장이들은 정치권 인사들한테 정보를 많이 입수해서 세상사에 제법 밝다고 합니다.
    결국, 사주책에 의해서 점 봐준다기보다는, 세상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충고를 해준다는 게 맞지 않을까요........ 쩝.

    옛날에는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 가서 팔자 고치라는 말을 여성들이 들었는데, 요즘은 남자가 그런 소릴 듣다니....... 큼;;;;;;;;
    아무래도 이런저런 이유로 스크린쿼터는 폐지되지 않을까 싶은 예감이........
  •  마리 2007/11/30 23:19 # 삭제 답글

    저도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중략...하고 싶은 말들뿐이더군요.
  •  레이린 2007/11/30 23:22 # 삭제 답글

    그 아저씨가 크레이모어급 대검을 감독님의 가슴에 꽂아넣은 분위기군요.
    연말이 다가오는데 저는 절대로 토정비결 같은 것도 생각지 말아야 겠다고 방금 다짐했습니다.
  •  앵벌천국 2007/12/01 15:44 # 삭제 답글

    ...중략...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
  •  마력덩어리 2007/12/01 20:13 # 삭제 답글

    중략... 두글자로 확실하게 맺어지네요. 반전이 필요한데...
  •  JINN 2007/12/02 23:32 # 삭제 답글

    애드맨님 이 블로그 포스팅들로 그냥 책을 출판하시면 한큐에 여지껏 밀린 수당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버실 것 같아요 진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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