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연예 스타 인맥

 


간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제법 친했는데 대학교 진학과 동시에 전국 팔도강산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한동안 연락이 두절됐다가 서울에서 사회 생활하며 하나 둘 씩 만나게 된 친구들이다.


만나자마자 삼겹살에 소주로 달렸으나 1시간 30분만에 이야기 꺼리가 다 떨어져버렸다. 남자 넷이 만났는데 딱히 열 올리며 할 말이 없었다. 각자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고 떨어져 지낸 공백기가 너무 커서인지 정말 1시간 30분 이상 할 이야기 꺼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연예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동안 직접 실물을 본 연예인 이름을 열거하지 않았다면 1시간만에 계산 끝내고 헤어졌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망해가는 영화사의 이름을 아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투자나 제작 그리고 기획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사실 나도 투자, 제작, 기획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간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나는 영화일을 하는 영화인이었고 당연히 알고 지내는 연예인이 몇 명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모 연예인과는 가끔 전화 통화도 하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는데 그럼 한번 전화해보라는 친구가 있어서 당황했지만 지금 시간이 너무 늦어서 예의가 아니라고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겼다.


내가 알고 있는 연예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만 알고 상대방은 나를 모르는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닥에 있지 않은 친구들에게 연예인을 직접 봤다는 사람의 경험담은 30분 정도는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 같다.


직접 본 연예인 이름을 다 열거하고 난 후 야하고 부질없는 여자 이야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여기서 이러구 있지 말구 나이트나 가자고 호기를 부리는 바람에 곧장 택시를 잡아 삼겹살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이트로 향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 넷이서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 이르고 해서 대안이 없었다.


호기부렸던 친구가 웨이터에게 팁을 후하게 줬는지 끊임없이 자리로 여자 손님들을 데려와 앉혔다. 나는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호기부렸던 친구 빼곤 다 내 마음과 비슷해 보였다. 게스트로 80년대에 날렸던 댄스가수가 나와 왕년의 히트곡들을 메들리로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는데 다음에 누굴 만나면 아무개 댄스가수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웨이터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온 여자들중 몇몇은 나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OO영화사에 다닌다고 했는데 망해가는 영화사의 이름을 알고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중 한명이 영화사에서 일하면 연예인 많이 봐서 좋겠다고 했는데 아는 연예인 별로 없다고 사실대로 말해줬다.


그들에게 나는 나이트에 와서 제일 저렴한 기본 메뉴만 시킨 테이블의 남자일 뿐이다.

덧글

  •  모모맨 2007/10/04 06:35 # 답글

    저는 그 기본요금에 추가 시킬수 있는데도 물버린다고 내쫒기는 연상의 아저씨 입니다.. 오늘도 출근해야지요.?
  •  RIRUKA 2007/10/04 17:55 # 삭제 답글

    저는 망해가는 연예인 소속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쥔장님과 알듯 모를듯한 동질감이 댓글을 쓰게 하는군요.
    저도 아는 연예인 별로 없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기획사 사장들(= 깡패)만 많이 압니다.

    남들은 제가 소속사 다닌대니까 대단한 줄 알더군요
  •  애드맨 2007/10/04 22:26 # 답글

    모모맨님 // 그래야지요^^
    RIRUKA님 // 듣기만 해도 동질감이 느껴지네요. 반갑습니다!
  •  마리 2007/10/05 10:27 # 삭제 답글

    전 망해가는 영화 잡지사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망했고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기자로 일한다니까 배우들 많이 만나는 줄 알더군요.
    찌질하게 집적대는 감독들을 더 많이 만났습니다 .
  •  joyce 2007/10/05 16:01 # 답글

    우연히 들렀다가... 링크 신고하고 갑니다.
  •  애드맨 2007/10/06 01:38 # 답글

    마리님 // 찌질하게 집적대는 감독들이라니 저도 아는 분일수 있겠습니다ㅎㅎ
    joyce님 // 감사합니다.
  •  마력덩어리 2007/10/16 21:08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  라엘 2007/10/27 15:00 # 답글

    푸핫핫핫. 저는 망해가는 엔터사 직원입니다. 링크 안할 수가 없네요! 링크 신고합니다!!!!
  •  dew 2008/04/15 15:37 # 답글

    푸하하하핫! 저는 이미 망한 외주제작사 미술팀직원이었습니다!!! 드라마 엎어져서 월급 3개월치 못 받고 나왔습죠!!!!
  •  ㅂㅂㅂ 2008/05/16 15:09 # 삭제 답글

    리플만 읽어도 눈물이 발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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