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한맺힌 엔딩 크레딧

 


기획팀은 조만간 모든 걸 정리하기로 합의를 봤다.


우리 세 명이 같은 날 같은 때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한날 한시에 퇴사하자는 결의를 한 적은 없지만 계속 근무한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고 퇴사하겠다고 해도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않으니 예정된 퇴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번 퇴사가 나의 의지는 아니지만 쪽팔리지는 않고 싶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이라서 어쩔 수 없고 내 주변 영화인들도 다 놀고 있다는 핑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껏 고용해줬지만 결과물이 없으니 투자한 월급이 아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일테니 영화계 불황은 결국 핑계일 뿐이다.


영화사 입사 이후 내가 아이템을 발굴해서 허락을 받은 후 작가를 붙여 진행시킨 서너개의 프로젝트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프로젝트는 하나 뿐이다.


처음부터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진행했던 것은 아니고 작가와 나 둘이서만 좋다고 신나서 밀어붙였는데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팀장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고 대표는 돈을 준비해왔다. 구박받고 서럽고 슬프고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한 차마 말 못할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작가의 통장에 계약금이 입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감동은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롭다.


회사가 망해가고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품을 진행할 수 없게 됐을 때쯤 다행히 그 프로젝트를 인수하고 싶다는 돈이 많다는 영화사가 나타났고 지금은 작품을 넘기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회사 차원의 비즈니스가 시작된 후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아마 이 작품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고나면 이 원작 아이템을 처음 본 순간 꼭 영화화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각오와 애정 그리고 작품 개발 허락을 받기 위해 원작자를 처음 찾아가서 만났을 때의 설레임 마지막으로 같이 일해보자고 연락한 작가에게 꼭 같이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쁨 등의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영화화를 추진하던 작품이 잘 진행되고 있다니 처음에 이 작품은 안된다고 나에게 말해주던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고 내가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거 같아 나 스스로 뿌듯하고 이 작품을 위해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회사 작품이고 크레딧에도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화가 난다.


팀장님은 기획 크레딧에 최초 개발자인 내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건의는 해주겠다고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그건 이루어지기 힘든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그 회사에도 기획팀이 있고 모두의 반대를 이겨내고 이 작품을 해보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을테니 그 사람의 이름이 기획에 오르는게 당연하다. 그 사람이 날 언제 봤다고 기획 크레딧을 공유하고 싶겠는가.


작가는 술만 마시면 나에게 전화해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회사로 가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나도 그 작품을 진행시킬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작가가 고마울 뿐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허탈할 뿐이다. 정신건강을 위해 이 작품의 극장 개봉일에 출발하는 한달 정도 코스의 동남아 여행 패키지 상품이라도 알아봐둬야겠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나는 이제 그냥 이 작품을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팬의 한사람일 뿐이다.

덧글

  •  younguns 2007/11/25 23:23 # 삭제 답글

    아자아자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휴식시간이 왔다고 생각하시길....
  •  심리 2007/11/26 03:43 # 삭제 답글

    내 자식을 남의 집에 입양보내는 심정이 아닐까 싶네요. 흠...... 역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는 여행이.....
  •  지나가다... 2007/11/26 04:59 # 삭제 답글

    님 영화 제목이 뭐에요?
  •  NINA 2007/11/26 06:38 # 삭제 답글

    거참 마음아픈 얘기군요.
  •  dARTH jADE 2007/11/26 10:08 # 삭제 답글

    아이고, 딸자식 시집보내는 아부지 마음만큼 서운하시겠어요.
  •  마리 2007/11/26 11:42 # 삭제 답글

    아..정말로 마음이 아프네요. T_T
  •  마음씨 2007/11/26 12:18 # 삭제 답글

    저두 기획한 책이 다른사람 손에 수정되고 출간되었을 때 .. 판권에 이름이 없을때 느낀 그런 느낌..
    아-아- 공감해요. 책보다 영화는 스케일이 커서 더 허전하실듯 싶네요.
  •  카렌 2007/11/26 13:05 # 삭제 답글

    마음아픈 이야기네요.. 꼭 여행 다녀오세요. 남일같지 않습니다..
  •  이방인 2007/11/26 13:05 # 삭제 답글

    아픕니다.
  •  혜진 2007/11/26 14:48 # 삭제 답글

    블로그에 놀러오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알아주자나용..
    좌절하지 마삼..
    인생은 깁니다... ^-^
  •  ㅎ훈이 2007/11/28 02:37 # 삭제 답글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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