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번 잘 나가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 묻어가보고 싶었을 뿐인데...
영화사 입사 후 나도 언젠가는 한편 만들 수 있겠거니 하는 다소 나이브한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그런 나이브한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화를 만들든 말든 회사가 망하지만 않으면 월급은 나오니 굳이 애써 정열을 불태우면서까지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영화를 한편 만들어 극장 개봉까지 시켜낸다면 그 희열과 보람은 대단하겠지만 그만큼 스트레스와 리스크도 많기 때문에 희열과 보람은 없지만 스트레스와 리스크도 없는 무사안일 월급쟁이 생활에 끌리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꿈이 어쩌니 자아실현이 어쩌니 해도 최소한의 노력과 투자로 평균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요즘엔 영화 한편 만들어봤자 재수없으면 2~3일 운 좋으면 한달 정도 극장에 걸리고 마니 그저 허무할 뿐이다. 그나마 극장에 걸리는 건 양반이고 개봉조차 못하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다.
치열하게(?) 비정규 인생을 살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시절엔 그런 영화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스터리였는데 지금 내가 딱 그런 마인드가 몸에 베어버린 복지부동 공무원 같은 영화사 직원이 되버렸다. 제 아무리 날고 기던 사람이라도 영화판만 오면 바보가 되고 강우석도 사옥 잡혀 대출받아 영화를 만들고 CJ엔터테인먼트도 지주회사 출범 후 대손충당금이 백억이 넘는 마당에 고만고만한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잔머리를 굴려본다한들 답은 나오지 않으니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한없이 게을러져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든 추진해서 이루어내겠다는 믿음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자신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똑똑해보이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어지고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믿음을 줬으면 좋겠고 의심만 많은 자신을 설득시켜줬으면 한다. 결국엔 잘나가는 누군가에게 묻어갈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는데 묻어갈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 손가락만 빨다가 회사가 망하는 꼴을 구경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각오로 섣불리 나섰다가는 작년처럼 100편 개봉에 90편 쪽박이라는 현실 앞에서 피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으니 차라리 가만히 있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관망만 하는게 정답도 아닐테니 역시 슈퍼맨같은 누군가에게 묻어가고만 싶었던 것이다.
대표가 슈퍼맨이었다면 몇 년 더 배부르고 등따시게 살 수 있었겠지만 회사 망했고 이미 꿈 깼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슈퍼맨이 시키는데로만 일하면서 정시 출퇴근하고 주말엔 놀러다니며 살고 싶었던 내가 한심하다.
묻어가기는 글렀고 이젠 스스로 증명하거나 미련을 버리거나다.
덧글
마력덩어리 2007/11/05 00:33 # 답글
어려운 주제네요- 고등학교 때, 친구로부터 '넌 수동적이야' 하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 말이 평생의 채찍질이 되는군요.
- 누군가가 생활고에 닥치거나, 통장에 돈 찍히면 '부아앙' 하고 엔진이 걸린다고 한 얘기가...--;; 그러니까 역시 헝그리정신!만이 (불사파 만세~)
울트라맨 2007/11/06 08:02 # 삭제 답글
제가 애드맨님 연배를 잘 몰라서..외람될 수는 있지만..
묻어간다는게..어느 시점에선 미덕일겁니다. 그리고 잘 묻어가는 것도 강태공이 그러했듯이 긴 안목에서의 성공을 위해 겪어 가야할 인고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묻어가든, 자신을 확인하면서 가든 분명한 것 하나는 아마도 내가 나중에 누군가를 보듬어 가야 할 때 그럴 수 있는 넓은 깜냥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비판의 기준은 그것이 되어야지.. 단순히 묻어가냐 묻어가지 않느냐가 기준이 될 순 없지 싶습니다. 임진왜란에 모두가 이순신 장군이었다면..이겼겠습니까??- 울트라맨님 // 좋은 말씀해주시는데 연배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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