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1일 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오프라인으로 표시

 




아직 회사를 관두지도 않았는데 메신저에 들어갈 때마다 오프라인 표시로 들어가게 된다.

메신저에 접속할 때마다 대화상대로 등록되어 있는 작가들에게 작품 진행 과정에 대한 문의가 오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잘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잘 되고 있다고 사기를 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속 편하게 오프라인으로 표시로 은밀하게 접속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심정은 아마 이럴 것이다. 한 두번 겪은 것도 아니고 안봐도 훤하다.


처음 계약을 할 땐 좋다. 설레인다. 드디어 꿈을 이룬 듯한 성취감이 들 것이다. 그날 이후 (보통 각색 계약까지 한다) 작품 진행 회의도 하고 술자리도 자주 갖는다. (이런 술자리에서 연분이 생기기도 한다는데 나는 안 겪어봐서 모르겠다.) 자신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 두근거린다. 영화사 사람들과 친해진 기분이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세상이 아름다워보인다. 회의 때마다 A4에 인쇄되서 나온 과학적으로 보이는 시나리오 모니터 결과 같은 걸 보면 왠지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가고 회의를 거듭해도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한 소리 또 하고 뜬구름 잡는 기분만 든다. 이제 설레임은 없다.


일주일에 두세번 가던 영화사를 한번만 가게 되고 다음 미팅은 일주일 뒤로 한달 뒤로 혹은 준비되면 연락할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술자리도 없다.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거니 생각하며 속편하게 집에 간다. 방에 들어와 예전에 써두었던 이런 저런 아이템들을 뒤적이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 만나서 술도 마시다보면 한달은 금방이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반가운 마음에 영화사에 가면 뭔가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일단 회의 참석 인원이 예전보다 적고 회의 진행 준비 상태가 미흡해 보이며 심지어는 지들끼리 진행해보고 연락준다더니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답이다.


예전엔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였는데 이제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맞은 편에 앉은 영화사 직원과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정말 잡다한 얘기를 하다가 할 얘기가 다 떨어지고 나면 작품 얘기를 시작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별 진행사항은 없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히 윗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해준다. 작가로서는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들을 얘기도 없다. 계약서에 명시된 돈이나 다 받았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의 설레임은 다 어디로 가고 권태기의 연인처럼 김빠진 분위기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다 그런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영화사 문을 나서면 어느 작가는 쓰자마자 스크린까지 직행이라는데 나는 왜 이러나 싶어 한숨이 나오지만 누구랑 술마시고 싶은 기분도 안 나고 해서 곧장 집으로 간다. 괜히 차를 끌고 온 경우엔 제법 나온 주차비에 피눈물이 난다. 집에 도착해 통장 잔고를 체크해보면 얼마 되지도 않던 계약금은 어디로 가 버린걸까? 잔고를 확인한 순간 고향에 온 듯한 궁핍한 절망감이 온 몸을 휘감아온다. 다시 원점이다.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메신저에 들어가서 분풀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예전에 대화상대로 등록해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을 찾아본다. 회사에서 못다한 얘기도 하고 싶고 진행사항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어 있다. 분명히 내가 차단하거나 삭제하진 않았는데 점점 메신저에서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예전에 심심할 때 메신저에서 만나면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잡담도 많이 나눴는데 요즘엔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혹시 나를 차단한걸까? 아니면 오프라인으로 표시하고 몰래 접속하는 걸까?


답은 후자다.

나는 오프라인 표시로 몰래 접속한다;;

덧글

  •  마리 2007/10/14 11:27 # 답글

    ....제가 전에 망해가는 출판사에 다녔을 때 저자들에게 했던 행동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째서 제가 다닌 회사들은 '망해가는 영화잡지사' 아니면 '망해가는 출판사'였는지..저는 한때 이 모든 '망해감'이 제가 타고난 '망할 팔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습니다.
  •  애드맨 2007/10/14 17:03 # 답글

    저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  ㅠ_ㅠ 2007/10/23 06:04 # 삭제 답글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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