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0일 월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즐거운 회식날

 


무심코 달력을 보니 이번 달 월급날이 이미 몇일 지나있었다. 예전엔 하루만 월급이 늦어져도 경리 직원이 무슨 무슨 이유로 월급이 늦어진다는 사내 메일을 보내고 직원들끼리도 왜 월급이 안나오는지 메신저로 물어보고 그랬는데 이젠 월급날이 언제였는지도 기억조차 나지 않고 안 나와도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다.


언젠가부터 월급날이 하루 이틀 일주일씩 늦어지기 시작했고 점점 늦어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잘하면 한달치 월급 정도는 그냥 건너뛰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 8월달 월급이 9월 중순에 지급됐으니 한번 늦어지기 시작한 월급날을 다시 돌이키려면 한달에 급여가 두 번 나와야 되는데 지금같은 분위기로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 망하지도 않은 회사의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는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한 때 우리 회사는 회식을 자주 하기로 유명한 회사였다. 월급도 제때 제때 꼬박 꼬박 나왔고 사무실에는 군것질 거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직원들끼리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사내 예절도 중시했고 인사고과도 신경쓰던 시절이었다.


회식은 보통 1차는 삼겹살에 소주, 2차는 맥주나 칵테일, 3차는 노래방, 4차는 집에 가기 싫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갖는 모임의 코스로 진행된다. 1차는 풍요롭게 구워지고 있는 삼겹살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회사 이름을 외치며 소주를 원샷하고 2차에선 평소 친하게 지낼 기회가 없던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 맥주잔을 부딪히며 우애를 나눴으며 3차 노래방에서는 모두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질러대며 광란의 막춤을 추곤 했다. 대표가 18번을 부르면 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어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가 부르는 노래에 흥에 겨워했고 누군가 댄스곡을 부르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은근히 눈총까지 받았다. 서로에게 뿌려대기 위해 맥주를 주문했고 테이블은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추기 위한 용도였다.


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하나였고 가장 중요한건 사내 화합이었으며 경쟁상대는 헐리웃이었다. 1차, 2차, 3차까지 누구 하나라도 먼저 집에 가면 배신자라고 욕할 정도로 회식 분위기도 좋았다. 뒷담화를 나눠도 결국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났고 틈만 나면 대표 옆으로 가 술잔을 기울였다.


3차가 끝나도 집에 가기 싫은 직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의기 투합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이때부터는 평소 마음에 담아두었으나 하지 못했던 속깊고 예민한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깊고 진한 사내 우애를 조성하는 시간이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고 새벽 공기가 서늘해도 손에 손을 잡고 헤어지기 싫은 우리들이었다.


그러나 월급이 늦어지고 회사가 어렵다고 소문이 나면서부터 상황은 바꼈다. 회사가 대학 친목 도모 동아리도 아니고 돈 좀 벌어보겠다고 모인 건데 돈이 안 나오니 출근의 이유가 애매모호해진 것이다. 언제 마지막으로 회식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사무실에 일거리가 없으니 직원들끼리 화합할 계기도 없어졌다. 좋았던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무실에는 원망이 피어났고 불신이 조장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표가 비밀리에 뭔가 큰 껀수를 준비하고 있고 언젠가 우리를 놀래킬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내일도 출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덧글

  •  therefore 2007/09/28 21:47 # 답글

    ㅠㅠ
  •  Reibark 2007/09/29 00:29 # 답글

    눈물없인....T.T
  •  chokey 2007/09/29 00:49 # 답글

    사진ㅡ 강남이로군요..ㅠ
  •  Rick 2007/09/29 11:54 # 답글

    요즘 힘든사람 너무 많아요..망해가는 영화회사라도 좋으니 일좀하게 해주세요...
    정말 열심히 할태니 일좀 시켜주세요...
  •  애드맨 2007/09/29 15:08 # 답글

    Rick님 // 저에겐 인사권이 없어서요. 죄송요;;
    therefore, Reibark 님 // 그냥 웃자고 쓴 글이니 울지 마세요 ㅎㅎ
    chokey님 // 예리하시네요! 강남 맞습니다.
  •  tommi 2007/09/30 17:10 # 답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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