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영양가

 


갑자기 뭔가 부탁할 일이 생겨 망해가는 영화사를 대학교 동아리 탈퇴하듯 그만둔 전직 엘리트 인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열 두어번 울리더니 소리샘으로 연결되었다.


설마 그래도 한 때는 한 식당 테이블에서 5천원짜리 백반을 나눠 먹던 사이였던 전직 엘리트 인턴이 해가 중천에 뜬 화창한 대낮에 내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극장에 있거나 도서관에 있거나 자고 있거나 목욕 중이거나 등등 내 전화를 받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서 1시간 정도 지난 후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이번에도 통화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두 번 밖에 전화를 걸어보지 않았고 삼세번은 기본이란 생각에 혹시나 해서 30분 정도 지난 후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통화는 되지 않았다. 내 전화를 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확인사살 차원에서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 문자는 괜히 보낸 것 같다.


전직 엘리트 인턴은 아마도 내 전화 받아봤자 아무런 영양가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 따위의 전화를 받아봤자 자신의 인생에 도움 될 일은 커녕 귀찮기만 할 거란 생각에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억울해서라도 이대로 망해가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조만간 대박 영화를 만들어 전국 관객 500만명을 돌파시켜 대박 영화 기획자가 되자. 그리고 언제나 괜찮은 기사가 많이 실려있는 영화 주간지 필름2.0에서 인터뷰 제의가 오면 마지못해 수락한 다음 (씨네21의 인터뷰 제의는 두 번 정도는 거절할 생각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망해가는 영화사가 한참 망해갈 때 망해가는 영화사를 대학교 영화 동아리 탈퇴하듯 그만둔 전직 엘리트 인턴이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 따위의 전화를 받아봤자 자신의 인생에 도움 될 일이 하나도 없을 거란 생각에 끝까지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고 반드시 대박 영화를 만들어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는 우스개 소리처럼 해 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우연히 전직 엘리트 인턴이 지하철 같은 곳에서 필름2.0을 돈 주고 사서 보다가 한 때는 자기가 전화조차 받지 않았던 무능력하고 시니컬하기만 했던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이 대박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게 다 훌륭한 감독과 물건을 볼 줄 아는 투자사 덕분이라고 겸손한 척 하며 인터뷰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때 내 전화를 세 번 연속으로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되겠지...??


그냥 웃자고 해 본 소리였고 사실 나도 영양가 없어 보이는 무능력한 지인의 전화는 어지간하면 받지 않는 편이라 엘리트 인턴을 비난할 입장이 아니다. 흥행참패라는 형극의 가시밭길을 걷고 계시는 몇몇 감독님들의 전화를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이유로 여러 번 무시했고 지인들이 모니터 좀 해달라며 보내줬지만 한 장도 읽지 않은 시나리오들이 내 컴퓨터 속 폴더 안에 1기가는 될 것이다. 물론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영양가 있어 보이는 지인들의 전화는 전화벨이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받는 편이고 그런 지인들이 문자를 보내면 대부분 전화 통화로 화답했다.


이런 게 인과응보라는 걸까?

덧글

  •  술과고기 2008/03/22 04:50 # 삭제 답글

    시나리오로 1기가라면 그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요... 자신의 꿈을 쫓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걸 알았습니다.
  •  네모도리 2008/03/22 08:15 # 삭제 답글

    웃자고 한 이야긴데 왠지 가슴을 후벼파는군요
  •  krzys 2008/03/22 08:27 # 삭제 답글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를 읽고 나면, 세상 사는 게 무서워져 갑니다. 더불어 애드맨님도요. 물론 제일 무서운 건 저고요.
  •  라엘 2008/03/22 12:54 # 삭제 답글

    ??에서 두번 웃었고요.

    인과응보라기보다 글의 내용은 인지상정?
  •  동사서독 2008/03/22 16:48 # 삭제 답글

    직장인의 삶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라고 안타까워하다가 백수인 제 신세를 깨닫고 OTL
  •  애드맨 2008/03/23 02:17 # 수정 삭제 답글

    술과고기님 // 죄송요. 과장법이었습니다. 1기가까지는 안됩니다ㅎ;;;

    네모도리님 // 안 웃겼다면 죄송요;;;

    krzys님 //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ㅜㅜ

    라엘님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동사서독님 // 안타까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러브햏 2008/03/23 16:13 # 삭제 답글

    믿는데로 이루어진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공상하듯이 쓰신 글인거 같지만,
    시작은 다 꿈과 공상 아니겠습니까?
    껄껄 이렇게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들려서 즐거운 글 읽고가는 독자들도 많으신거 같고요.
    꼭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 아니 성공하실거 같은데요?
  •  러브햏 2008/03/23 16:14 # 삭제 답글

    PS 그래야 성공하고 그 이야기를 또 여기에 올려주실테니,
    기대할게요.
  •  애드맨 2008/03/23 21:17 # 수정 삭제 답글

    러브햏님 // 저도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이런. 2008/03/24 10:44 # 삭제 답글

    아마 그 인턴은 지금쯤 외국에 있을 것 같은 느낌....
    있는 사람들은 이럴때 머리도 식힐겸 외국에 나가더라구여...
  •  은재 2008/04/04 07:31 # 삭제 답글

    문득, 시나리오 좀 읽어봐 달라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영화사 기획실 언니에게
    네이트온으로 시나리오를 전송한 사실이, 확 걸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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