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타임머신

 


3년 전 어느 날, 조만간 스크린쿼터가 없어질 것 같다며 영화판을 떠난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한국영화도 없어질 테니 공무원이나 되서 풍요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었는데 공무원 시험이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고 합격률이 낮다지만 신인감독이 입봉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확률보다는 높고 한 번 합격만 되면 여생이 보장된다며 정~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주말에 틈틈이 캠코더로 친구들 불러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후배가 영화판을 떠난다고는 했지만 사실 영화 일을 하려고만 했고 말만 많았지 실제로 뭔가를 한 적은 없기 때문에 영화판을 떠난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여간 졸업 후 마냥 놀다가 시나리오 학원에서 몇 달을 보내고 영화판을 떠난 후배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긴 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독서실이 아닌 PC방에서 온라임 게임에 빠져들었다. 눈치가 빠르고 대학교 입학 성적도 좋았고 머리도 제법 좋은 편이었던 후배는 온라임 게임의 세계에서는 영화계의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 부럽지 않은 권세를 과시할 정도의 거물이 되었지만 부모님이 공부 열심히 하라며 차려주는 따뜻한 아침밥을 먹은 후 집에서 나와 PC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더 이상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참 온라임 게임에 몰입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엔 온통 눈이 쾡한 폐인들 뿐이고 갑자기 숨이 막혀오길래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PC방에서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막막하기만 하던 순간, 문득 자신에겐 영화적 재능이 있으니 언젠간 훌륭한 감독이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한국영화계엔 눈먼 돈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도 났다.


후배가 영화판을 떠난 후엔 후배의 예상대로 스크린쿼터가 다소 줄어들긴 했지만 한국영화계는 전성기를 맞이했고 누군가가 말 몇마디 잘해서 눈 먼 돈을 챙겨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훈훈한 소문이 돌기도 했던 게 사실이었다. 후배의 한국영화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후배는 지금도 영화계에 눈먼 돈이 날아다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자기가 지금부터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는데 대박 시나리오를 쓸 자신은 있지만 써 놓고 나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 망해가는 신생 영화사에 걸렸다가는 돈도 못 받고 엔딩 크레딧엔 이름도 못 올리고 양아치 같은 피디나 대표에게 아이템만 도용당할 우려가 있고 메이저 영화사에는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를 들이민다 해도 이미 구매는 했지만 제작은 못하고 있는 제법 괜찮은 시나리오들이 쌓여있을 테니 갖다줘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라는 것이다.


마치 3년 전의 세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후배에게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온라인 게임에 너무 빠져 주변에 영화하는 친구도 없고 포탈에 올라오는 뉴스도 안 보는게 분명했다. 일단은 무슨 시나리오를 쓰려는 건지 물어보았는데 후배는 나의 눈치를 보며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라며 몸을 사렸다. 설마 내가 아이템을 도용할 것 같냐며 얘기 좀 해보라고 하니 그제서야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며 주변을 돌아보곤 장황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아이템 설명을 마친 후배는 대박이 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참을 얘기하고는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한다. 그러고는 형이 생각해도 잘 될 것 같지 않냐길래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진짜 재밌을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후배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후배는 말은 잘하지만 평생동안 단 한 편의 시나리오도 완성 시킨 적이 없는데 이번에도 아마 오늘 하루 정도만 시나리오 써보겠다고 끄적이다가 내일 아침엔 다시 PC방으로 출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 게임 세계의 거물이고 돈도 벌려고만 하면 제법 벌 수 있다는데 뜬금없이 평생동안 안 쓰던 시나리오 쓰겠다고 골방에 틀어박히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

덧글

  •  슈타인호프 2008/03/14 02:37 # 삭제 답글

    아이템 장사를 하는 편이 훨씬 수입이 좋을 듯 합니다(...)
  •  라엘 2008/03/14 02:45 # 삭제 답글

    그쵸. 아이템 장사는 바로바로 현금이니... (먼산)
  •  JINN 2008/03/14 02:55 # 삭제 답글

    으쩌쓰까...........T T
  •  네모도리 2008/03/14 09:10 # 삭제 답글

    [나는 진심으로 후배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진심임까? 정말? ^^
  •  Labyrins 2008/03/14 09:34 # 삭제 답글

    저 역시 그 후배에겐느 아이템사업을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요...-_-;;
  •  비타민 2008/03/14 14:02 # 삭제 답글

    아.....온라인 게임............... 정말 인생 망치기 딱 좋죠.... 저도 한때 잠시 빠졌었다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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