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MT

 


MT가 취소됐다.


지난 주에 대표님이 뜬금없이 때가 됐으니 우리도 MT를 가자고 하셨다.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평일에 가는 MT도 아니고 주말 껴서 가는 MT여서 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다른 직원들과 인턴들의 좋아라 기뻐하는 모습에 감히 싫은 티를 낼 수 없었다.


몇 명 남지 않은 인턴들이 MT와 관련된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추진했는데 나중에 스케쥴 표를 보니 과연 빈틈없이 치밀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놀러가서 술먹고 토하고 롤링페이퍼 같은 것들에 지겨워질 때쯤 밤 새워서 고스톱이나 치고 오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매우 건전하고 알찬 스케쥴이었다. 심지어는 펜션까지의 왕복 기름값까지 정확하게 계산되어 있길래 이런 뛰어난 인재들이 영화 제작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다시 한번 안타까웠다. 그날 이 후 한동안은 무슨 게임을 하고 놀아야 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들이 오고갔었다.


그런데 대표님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MT는 취소해야되겠다고 통보해오셨다. 청천벽력같은 MT 취소 통보를 들은 직원들 중엔 그냥 우리끼리라도 조용히 갔다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에는 실패했고 자연스레 MT는 취소됐다. 모두가 조금씩 돈을 내면 그깟 MT 쯤이야 두 번 세 번이라도 갔다올 순 있지만 다들 김이 빠진 것 같았다.


나는 MT가 취소되서 기뻤는데 막상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생기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마치 소풍 가는 날 내리는 폭우를 교실 안에서 바라보는 초등학생들 같다.


내가 영화일을 시작한 후로는 한국영화 산업이 점점 성장하기만 했기 때문에 그 때 누렸던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영화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한국 영화 산업의 좋았던 시절은 말로만 들었을 것이고 영화일이란 원래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만 생각할테니 한국 영화 산업의 마이너 언저리에서만 기생해온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내 잘못인 것 같아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그 동안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면서 여러번 워크샵과 MT를 갔다 왔지만 예정된 MT가 취소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이것도 한국영화가 어렵기 때문일까?


갑자기 예전의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다녀온 MT가 생각난다.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하루종일 술 먹고 고기 구워먹고 토하고 노래 부르고 놀다가 밤에는 캠프파이어도 하고 촛불켜고 롤링페이퍼까지 돌린 다음 잠이 안 오는 사람들끼리 모여 고스톱을 쳤고 나는 그 판에서 한 달치 월급을 벌었다. 그 때 챙긴 월급을 회식 때 다 써버렸으니 그냥 직원들 돈을 잠시 보관했다 돌려준 셈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흥청망청 기분좋은 한국 영화의 황금 시절이었다. 당시엔 망해가는 영화사가 망해가는 영화사가 아니었고 회사에서 진행하던 영화가 크랭크업되면 당연히 대박이 터질 줄 알았고 쪽박을 찬다해도 아무 지장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될 줄 알았다. 기회가 계속 올 줄 알았다.


지금 영화를 시작한 아이들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덧글

  •  교보문고죽돌이 2008/03/21 05:52 # 삭제 답글

    롤링페이퍼 ㅋㅋㅋㅋㅋㅋㅋ
  •  비타민 2008/03/21 07:35 # 삭제 답글

    롤링페이퍼는 아직도 잘 간직하고 계시는지요? ^^;
  •  미스타죠 2008/03/21 09:57 # 삭제 답글

    근데 인턴직원들은 이 블로그를 모르나요? 영화쪽으로 검색하다보면 다 발견했을텐데...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할 수도 있고.
  •  정시퇴근 2008/03/21 10:53 # 삭제 답글

    미스타죠// "이블로그는픽션이오니현실과혼동하시면더욱재미납니다" 라고 주인장께서 써 놓으셨네요 ^_^;;

    허허허 저도 현실 쪽에 한표이지만, 진실은 애드맨님만 알 수 있으시겠죠. ^_^;
  •  애드맨 2008/03/22 02:21 # 수정 삭제 답글

    교보문고죽돌이님 // 안녕하세요!

    비타민님 // 버렸습니다...ㅎ

    미스타죠님 // 들킨다 해도 픽션이니까 괜찮습니다. 걱정 감사요. ^^~~

    정시퇴근님 // 모범답안에 감사드립니다!!!
  •  성원 2008/03/22 10:58 # 삭제 답글

    사실 뉴스에서 '한국 영화 위기' 이런 기사 볼때 그래도 '우리보단 나을껄 ㅜ_ㅜ' 이랬는데 이곳에 와서 가끔 글을 읽다보면 그것도 아니구나, 다들 힘들구나 느낍니다. 영화보다 더 티켓 안팔리는 공연- 그것도 전통음악 쪽에 있는 저로써는 '대박'이란 단어는 너무나 낯선 단어ㅎㅎ 그런 날이 올지 상상도 '못'해본게 아니라 '안'하고 삽니다.
  •  러브햏 2008/03/23 16:18 # 삭제 답글

    저는 한국서 대학을 안다녀서 MT 한번 가는게 소원이라는...

    전혀 글과는 상관없는 리플입니다.
  •  은재 2008/04/04 07:26 # 삭제 답글

    이 글은...쫌, 슬프네요
  •  도와줘 SOS 2008/05/08 18:10 # 삭제 답글

    글을 읽다 보니 조금은 서글픈 감정이 드네요 ... ^^

    고스돕을 치셔서 1달치 월급을 ^^;; (님 타짜시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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