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까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퇴사했다.


최근 근무 태도를 보아하니 이번 달을 넘기긴 힘들겠다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퇴사한다고 하니 있을 때 좀 더 잘해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은 들었다. 그동안 내가 뭘 잘해줬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잘 해준 게 없어서 술이라도 한 잔 사야 될 것 같았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지만 사람일이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거고 만약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망해가는 영화사 퇴사 후 우여곡절 끝에 아주 아주 거물이 되고 나면 그땐 술을 사주기는커녕 전화 통화조차 못할 수도 있다.


망해가는 영화사를 그만두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로또를 한 장 샀는데 덜컥 당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로또 당첨금으로 영화에 투자할 가능성도 없진 않고 그 때가 되면 자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한테 잘해준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해서 지금 미리 술이라도 한 잔 사주면 나중에 설마 모른 척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솔직히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뭔가를 해 보려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어쩔 땐 한심하고 미련해보이기도 했는데 아마 본인에게도 힘들고 답답하고 안쓰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들 말은 번지르르 잘 하는데 실제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한국 영화계의 절대 불황으로 망해가는 영화사와 비교당하면 화 낼지도 모르는 메이저 영화사마저 위태롭다고 하니 망해가는 영화사의 사정은 굳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술이 좀 들어가고 나자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조금은 원망스럽다는 듯 왜 옛날에 자기가 추천한 원작 아이템을 무시했냐고 따지듯이 물어왔다. 참고로 얼마 전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모 외주 제작사에서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자기가 하자는 대로만 했으면 우리도 그 외주 제작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겠냐며 나를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는 작품을 보는 안목만큼은 메이저 외주 프로덕션 수준이지만 망해가는 영화사에 들어온게 실수고 설상가상으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는 팀장을 만나서 능력 발휘를 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쯤 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배웠기 때문이다.


나도 옛날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지금 나에게 하는 원망섞인 한탄을 다른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나의 한탄을 한참 들으시더니 <설득도 능력이다>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주셨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여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설득도 능력이다. 단순히 추천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누군들 영화를 못 만들겠는가.


그래서 나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에게 <설득도 능력이다>라고 말 해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지하철 끊길 시간됐다며 일어나겠다고 했다. 이대로 집에 보내기는 조금 미안해서 술집 옆의 편의점에서 커피 우유 한잔을 사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설득도 능력이라는 말은 괜히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왕 잘해주는 거 끝까지 잘 해주는 건데 성질머리하고는...

 

덧글

  •  동사서독 2008/04/11 00:49 # 삭제 답글

    로또 당첨금이 요즘 많지 않아서 영화에 투자하시는 것은 말리고 싶습니다. (엉?)
  •  비타민 2008/04/11 01:04 # 삭제 답글

    엔딩이 너무 슬프군요... 커피 우유 한 잔과 멀어지는 뒷모습이라니... ㅠㅠ
  •  가장나이가많은인턴 2008/04/11 01:04 # 삭제 답글

    메롱
  •  술과고기 2008/04/11 08:16 # 삭제 답글

    그 정도면 그래도 잘 해주신거죠.
  •  Labyrins 2008/04/11 08:56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다...좋은 말이네요.
    어쩌면 사회생활 하면서 자신의 역량보다 더 중요한게 말하고 설득하는 능력 같습니다.
  •  Lohengrin 2008/04/11 09:03 # 삭제 답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분도 그로인해 뭔가 배우지 않았을까요
  •  지랄오발탄 2008/04/11 09:09 # 삭제 답글

    어째 점점...
  •  정시퇴근 2008/04/11 10:15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긴 합니다만... 좀 씁쓸한 것이 "억울하면 성공해라"와 똑같은 말처럼 들려서 좀 마음이 그렇네요..ㅎㅎ
  •  케야르캐쳐 2008/04/11 12:25 # 삭제 답글

    정시퇴근 님의 덧글이.. 참........ 동감입니다.
  •  나는나야 2008/04/11 17:41 # 삭제 답글

    유심초 노래 가사네요 ^^
  •  심연 2008/04/11 19:26 # 삭제 답글

    설득도 능력이고,
    줄 잘 서는 것도 능력이고,
    부모 잘난 것도 능력이고,
    머피보다 샐리하고 친한 것도 능력이고,
    망하지 않을 회사 찾아가는 것도 능력인 듯 합니다...

    그나저나 좀 씁쓸한 글이네요....
  •  라엘 2008/04/12 20:58 # 삭제 답글

    요새는 글속 등장인물들이 자주 나타나서 리플을 다네요. ^-^

    에휴... 설득도 능력 맞고요, 잘난 부모님 만나는 것도 지 능력이고요... 저는 파릇파릇한 이십대 초반에 존경하옵는 어느 편집장님께서 그 말씀 해주셨어요. 저 역시 반박할 말이 없더라구요. 심연님의 말, 나이들수록 정답이에요. 흑흑흑.
  •  은재 2008/04/13 01:23 # 삭제 답글

    월욜날 대표랑 미팅있는데.
    '설득'....잘해야 되는데.
    ㅡ,ㅡ;
  •  글로리ㅡ3ㅢv 2008/04/30 01:06 # 삭제 답글

    어떤 분야에서나 비슷한 후회, 원망을 하게 되는것 같군요. 설득이 능력이라면 좋은 소리를 담아 실행에 옮길수 있게 밀어주는 것도 또한 윗사람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상황이 어찌되었든 다른 대안이 없을 때는 가까운 사람,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충고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자칫 '니가 뭔데', '너 보다는 내가 더 잘안다' 라는 선입견으로 무시할 때가 많았습니다.
    귀가 너무 얇아서 여기저기에 흩날리는 사람도 문제지만 고집으로 똘똘 뭉쳐서 자신에게 맞는 소리만 골라 들으려는 덜깨인 사람들이 많을 수록 프로젝트와 그 성과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더군요. 고집과 신념의 사이에서 사람과 일을 동시에 재단해야 되는 중용의 도를 일찍 깨우치지 못한게 저는 후회스럽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