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제목 회의

 


진행 중인 작품의 제목이 구리다는 의견이 많아서 제목 바꾸기 회의를 했다. 다들 내가 생각해도 이거보단 나은 제목을 지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었지만 막상 멍석 깔아주고 대안을 제시해보라고 하자 정작 나오는 대안들은 누가 생각해도 원래 제목보다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시작한 회의가 저녁 때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야심한 밤이 됐지만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이렇다 할 제목은 나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최소 네 다섯 가지의 제목안을 제시했고 토탈 백여개가 넘는 제목들이 나왔지만 원래 제목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제목은 서너개가 넘지 않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버스 끊길 시간이 되자 다들 지쳤는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최종 후보안을 간추려서 대표에게 전화로 알려줬더니 원래 제목이 낫다고 하신다. 몇날 몇일 동안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그냥 집에 가긴 좀 허탈하다고 생각한 직원들 몇명이 모여 모여 술을 한 잔 했다. 술이 좀 들어가니 회의 때 차마 못 했던 얘기들이 하나 둘 씩 나왔는데 아무개 직원의 무슨 무슨 제목은 우리끼리 생각해도 좀 너무한 것 같다, 최종 후보로 채택된 제목 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나은 게 없어 차마 반대는 못했다, 아무개 직원이랑 아무개 인턴이랑 사귀는 거 같다, 직원이 아깝다, 인턴이 아깝다 등등...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나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람막고 길막고 감독한테 욕먹으며 고함지르고 뛰어다니는 건 별로 재미를 못 느꼈지만 따뜻한 사무실에서 노가리까며 탁상공론하는 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언쟁이 시작되고 감정이 고조되고 가끔 얼굴도 붉히긴 하지만 회의가 끝난 후 가까운 술집에 가서 허심탄회하게 잡담하는 시간이 촬영 끝내고 홀로 택시타고 집에 가는 시간보다 정겹고 좋고 그런다.


적당히 술에 취해서 집에 가는 차에 앉아 창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영화 따윈 만들어져도 그만 안 만들어져도 그만이고 뭔 영화가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배아파하지 말아야겠다는 너그러운 마음도 든다. 제목 회의를 하다 보면 최근 히트친 영화의 패러디스러운 제목 안들이 많이 제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패러디 제목 짓기의 달인인 에로 비디오 업계 사람들은 요즘 다들 뭐 하고 있는걸까?


우리 회사에서 진행 중인 작품의 제목이 쿨하다고는 할 수 없고 구리다면 구리긴 한데 감독님은 정말 좋은 분 같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꼬장을 부리기야 하겠지만 길고 긴 고난과 인고의 세월을 보낸 우리 감독님이 꼭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싶다. 방금 전까지 같이 술을 마셨던 우리 직원들과는 회사가 망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서로 싫어하지 말고 메신저 차단 삭제 하지 말고 좋은 관계 오래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역시 술이 좀 들어가고 나니 그 동안 몸 담았던 망해버린 영화사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씩 떠오르며 안부가 궁금해지는데 특히나 지인들에게 한푼 두푼 꿔 간 후 잠적한 아무개 언니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밤이다.

p.s. 누가 추격자 욕 좀 시원하게 했으면 좋겠다. 나도 좋게봤지만 다들 죽인다고 하니 짜증날라 그런다;;

덧글

  •  JINN 2008/02/21 01:11 # 삭제 답글

    항상 애드맨님의 글은 마무리가 심금을 울려요
  •  애드맨 2008/02/21 01:12 # 수정 삭제 답글

    추격자 욕이요?ㅋㅋ
  •  newt 2008/02/21 01:22 # 삭제 답글 비공개

    ㅋㅋ추격자 욕은 아니구, 전 그냥그랬어요~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가.. 너무 감상적이다 싶은 몇 가지가 거슬렸구, 썰렁하게 남발되는 유머도 있었구.. 그랬네요. 무엇보담 불편한 심기로 본터라.. 좋은 환경에서 봤음 좋게 봤을 것 같네요. -_-;
  •  마리안 2008/02/21 01:27 # 삭제 답글 비공개

    항상 애드맨님의 글은 심금을 울려요 2
  •  비타민 2008/02/21 01:37 # 삭제 답글

    흠... 제가 생각해도 추격자는 모두 극찬들뿐이니....-_-... 설마 알바의 마수가....?
  •  이적 2008/02/21 08:46 # 삭제 답글

    스토리가 단순하고 늘어지는 점이 아쉬웠어요.
    너무 겅중겅중 뛰어다닌달까요?

    뭐 그 점을 제외하면 재미있었어요.

    ...이래서 다들 칭찬만 하는걸까요...?
  •  Labyrins 2008/02/21 10:21 # 삭제 답글

    나중에 애드맨님의 참여 작품은 꼭 극장가서 보도록 하지요...^^
  •  정성임 2008/02/21 15:48 # 삭제 답글

    추격자 욕 ㅋㅋ 너무 잘되니 배아픈ㅋ
    저도 자극적이라는 거 외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네요-_-;;...후우
    링크 추가 하고 갑니다~
  •  sesism 2008/02/22 10:27 # 삭제 답글

    추격자는 다 좋은데, 땀 뻘뻘나는 한여름에 시체를 그렇게 묻어놓고도 냄새가 안 퍼진다는 게 이상했어요. 게다가 비까지 좍좍 왔는데 썩지도 않고 시체파낼 때 어쩜 그렇게 막 죽은 사람 시체 같던지요.
    작년에 색화동에서 '목표는 똥꼬다' 포스터 보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아 정말 예술.
    어쨌거나 영화 잘 되시길 바랍니다 :)
  •  혜진 2008/02/23 01:10 # 삭제 답글

    나 감독님은 완전 기대주가 되셨더라구요 ㅎㅎㅎ
  •  애드맨 2008/02/23 01:46 # 수정 삭제 답글

    n비공개님 // 좋네요 ㅋㅋ
    ㅁ비공개님 // 울려고 쓴 글은 아닌데;;ㅋ
    비타민님 // 뭐 저도 재밌게 봤으니 ㅎㅎ
    이적님 // 동감입니다. 저는 슈퍼마켓이 젤 아쉬웠어요.
    Labyrins님 // 블로그에라도 자주 들러주셔요 ^^;;
    sesism님 // 마자요마자요 말이 안되죠?ㅋ '목표...' 포스터는 영화보다 더 웃겼어요 ㅋㅋ
    혜진님 // 이미 칭찬에 지쳐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칭찬은 곤란요 ㅋㅋ
  •  유니마르 2008/02/23 14:36 # 삭제 답글

    저도 추격자 좋게 보고 블로그에 극찬을 써놨지만... 요즘 하두 만장일치로 그러니 애드맨님이랑 같은 심정이 되갑니다. ^^;
  •  애드맨 2008/02/23 21:46 # 수정 삭제 답글

    유니마르님 //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잖아요(응?) ㅋㅋㅋ;;
  •  프리조아 2008/02/26 19:02 # 삭제 답글

    우리나라 경찰이 그정도로 멍청한게 현실일까 의문이 들어요- 정말 그럴까요?
  •  애드맨 2008/02/26 22:41 # 수정 삭제 답글

    프리조아님 // 개개인은 똑똑한데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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