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전직 영화사 직원의 면접

 


아는 분이 아는 분의 소개로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 면접을 보았다.


최고의 역사와 최고의 시청률 그리고 최고의 작가를 자랑하는 제작사지만 기획팀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 개발 작가를 고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전직 기획팀 직원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기획팀도 없었다. 양복에 넥타이 입고 출퇴근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도 답답해왔지만 소개시켜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 양복과 넥타이를 챙겨입고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굴지의 제작사를 찾아갔다.


십여명의 직원들이 정장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데스크 직원의 안내로 대표 방으로 들어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력서를 건넸다. 다른 루트로 얘기를 들어보니 신입 사원을 뽑는 회사도 아니라는데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킬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은 현장 스텝과 기획팀 직원으로서의 경력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잘하는 외국어가 있는지를 물어보시며 문화 관련 분야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외국어 중에서도 특히 중국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아는 외국어는 있지만 잘하는 외국어는 없고 중국어는 학교 다닐 때 교양으로 한 학기 들었을 뿐이어서 다 까먹었다고 하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면서 예술만 오래 하다보면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너무 정확한 지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언젠가부터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어울린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흥행 스코어나 제작비 등의 숫자엔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 있었고 영화 기획은 열심히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언젠가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한 없이 게으르게 살아왔고 친구를 만나도 영화 하는 친구만 만나왔다. 그나마 숫자와 게으름은 스스로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노력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영화하는 친구만 만나는 건 노력해도 잘 개선되지 않았다.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이 안 맞아도 대화는 통하고 얘기할 꺼리가 없으면 어느 영화가 들어가네 엎어졌네 누가 계약을 했네 월급을 떼였네 등의 정보 교환만 해도 두어시간 정도는 아무 노력 없이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님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의 포부를 들은 대표님은 이쪽 업계 일이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며 본인이 잘 키워줄테니까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키워준다는 말과 뭘 시키는지는 말도 안해주고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묻는게 웃겼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른 앞에서 내색은 못하고 그저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대표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당장은 할 수 없겠지만 꾹 참고 자기가 시키는 다른 일들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하셨다.

월급은 얼마면 되겠냐고 해서 미친 척 하고 전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두 배를 불렀는데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그 돈으로 괜찮겠냐며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셨다.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의 면접을 끝내고 나니 당시엔 몰랐는데 어째 내 길이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소주 한잔이 땡겼는데 남자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그림은 과히 좋지 않은 것 같아 맥주 한 캔 원샷하고 집에 왔다.

덧글

  •  하치 2007/12/09 11:56 # 삭제 답글

    엇... 다시 업무일지의 연장...인가요 ㅎㅎ
  •  마음씨 2007/12/09 12:20 # 삭제 답글

    감독과 울회사 사장님의 친분으로 PPL을 하였는데, 그거 땜시롱 모 영화업체와 일을 한적이 있었어요.
    영화업체 사장님 마음이 홀랑바뀌어 진행하던걸 뒤집으시니 어찌나 힘들던지... 갑자기 대표이사라니 고따구 기억이 나네효;;
    월급얘긴..그림이 그려집니다요. 애드맨님 글은 뭐랄까 마음의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오는 솔직한 맛이 일품이예요. ^^;;
  •  newt 2007/12/09 13:23 # 삭제 답글 비공개

    오홋.. 기대되네요.
  •  제리 2007/12/09 16:43 # 삭제 답글

    ...월급의 두 배를 불렀는데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그 돈으로 괜찮겠냐며...이거 적은데? 라는 의미일까요-_-;
  •  N 2007/12/09 19:46 # 삭제 답글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  핀치히터 2007/12/09 19:48 # 삭제 답글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야 하는건지 모르겠군요. 모쪼록 애드맨님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됐으면 좋겠습니다.
  •  타선생 2007/12/09 20:35 # 삭제 답글

    배부름이 행복인 듯 합니다. 아아..
  •  퍼프 2007/12/09 22:00 # 삭제 답글

    오 왠지 좋은 분위기의 면접 같군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빌어요~
  •  술과고기 2007/12/09 23:34 # 삭제 답글

    그래도 일단 뭔가 왔다 싶은 걸요. 힘내세요!
  •  ㅎ훈이 2007/12/10 07:16 # 삭제 답글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
  •  네모도리 2007/12/10 08:58 # 삭제 답글

    저는 이제 이길이 내길이냐 아니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월급많이 주신다면 굽신굽신~
    나두 꿈많은 청년이던 시간이 있었는데...
  •  혜진 2007/12/10 10:26 # 삭제 답글

    나이를 먹다보니, 직업은 돈을 버는 게 우선이면 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취미로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께서 키.워.주.신.다.는.데(얼쑤)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제2의 커리어(!)로 느긋하게 하겠다 맘 먹으심이 어떠신지요.. ㅎㅎ
  •  오사쯔 2007/12/11 15:33 # 삭제 답글

    이번 기회가 내가 원하던 기회가 아니다 싶더라도 내기회로 만드는건 자신의 능력 같아요.
    한번 능력을 시험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  오사쯔 2007/12/11 15:35 # 삭제 답글

    근데 정말 뭘 시킬지도 말하지않고 생각없이 잘할 자신있냐는게 웃기긴하네욤....

    근데 혹시 그분이 이 블록을 보지는 않을까욤?
  •  라엘 2007/12/11 22:31 # 삭제 답글

    오옷!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겁니다! 저는 부르면 무슨 일 하는 지 절대 안물어보고 일단 냉큼 달려갈 거에욧!!!!!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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