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생 영화사의 무보수 각색 의뢰는 거절했지만 친구인 내가 제안한 무보수에 가까운 아이템 각색 의뢰를 수락하고는 네이버 한핏줄 영화의 줄거리를 복사해서 적당히 각색한 다음 본인이 창작했다고 우기는 작가 지망생 친구에게 나는 너의 시놉시스를 재밌게 봤지만 대표님과 다른 직원들이 워낙에 싫어해서 미안하지만 같이 일하긴 힘들게 됐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고민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내일 모레 주말 쯤 전화해주려다가 그래도 딴에는 친구의 알 권리를 존중해주려고 최대한 일찍 알려줬지만 예상대로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처음엔 회사 근처로 불러서 소고기 김밥이나 치즈 김밥이라도 한줄 먹여서 보내려다가 기껏 집에서부터 먼 길 떠나 왔는데 김밥 천국에서 김밥 한 줄 먹고 해고 통보나 들은 뒤 다시 집으로 보낼 생각하니 잘못하다간 한 대 얻어 맞을 지도 몰라 그냥 전화로만 알려주었다.
친구는 비록 나의 아이템을 바탕으로 시놉시스를 쓰긴 했지만 자기가 새로 창작한 부분들이 있으니 그 부분들에 대한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내가 알려준 아이템도 알고보면 다른 영화들에서 짜깁기 한 것이니 나도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제법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니 말 다 맞다고 하니까 이 시놉시스를 발전시켜 새로운 시나리오를 한 편 써 버릴 테니 누가 먼저 극장에 거는지 두고 보자고 선의의 경쟁을 제안한다.
그래서 다 쓰면 우리 회사에서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양아치 같은 신생 영화사랑 일할 생각이 없고 시나리오의 저작권을 확실하게 주장하기 위해 아무도 안 보여주고 완성하자마자 곧장 시나리오 마켓에 올려버릴 테니 정 궁금하면 시나리오 마켓에 영화사 회원으로 로그인해서 다운받아서 읽어보라고 한다.
나는 니가 지금까지 아무런 소득없이 시나리오 마켓에 갖다 바친 돈이 한두푼도 아닌데 계속 갖다 바치고 싶냐고 차라리 그 돈으로 나한테 술을 샀으면 내가 얼마나 너에게 고마워할지 상상이 안 되냐고 물어보니 나한테 술 사줘봤자 나오는 것도 없고 자기 같은 무명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에겐 시나리오 마켓 말곤 본인의 시나리오를 번듯한 영화사에 보여줄 루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딱히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다음 주 쯤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한 뒤 전화를 끊었지만 내가 굳이 술을 살 이유는 없는 것 않고 그렇다고 친구가 술을 살 것 같지도 않아서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크다. 만약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있는 제3의 친구가 끼어든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엔 그런 여유있는 친구가 없기도 하고 이래저래 만나봤자 싫은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지금 우리의 우정이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친구가 내가 제안했던 아이템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번듯한 메이저 영화사에 판매한 다음 작가님 소리 들으며 영화사에 들락날락 거리며 촬영장 구경도 가고 극장에서 엔딩크레딧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모습도 구경하고 인터넷에서 자기 영화를 본 관객들의 리뷰들을 검색하며 울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면 솔직히 거짓말이고 아무래도 그 꼴을 보게 되면 흥행이 잘 되건 말건 배는 좀 아플 것 같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악플러가 될 지도 모른다.
친구가 너무 잘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덧글
교보문고죽돌이 2008/03/19 22:14 # 삭제 답글
애드맨님 문화일보 진출 축하드립니다.
지난해 제작된 한국영화 10편 중 9편이 적자란다. 대부분의 영화사들이 어렵다는 얘기다. 요즘 영화계의 이슈는 '알아서 짐 싸는 직원들'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라는 블로그가 인기다. 영화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에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제작편수가 예년의 절반으로 줄면서 달라진 충무로 영화사들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 블로그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많다. 부지런히 출근해 회사에 나와도 막상 할 일이 없고...비타민 2008/03/20 01:47 # 삭제 답글
오오, 문화일보에도 진출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이번 글도 잘읽었어요. 뒤로 갈수록 박장대소하는 애드맨님의 글 스타일은 정말 언제읽어도 감동입니다.
그래도 악플러는 되지 마세요!! ㅎㅎ- 어우 점점 유명 매체에 소개되는 빈도가 많아지고...
이러다 책 나오고 셀러브리티 논픽션 작가가 되는 거에요. 뭐 책 내는 게 별겁니까. +_+ - 소녀시대가 달려오고 있다~~!!
- 왔다가영
- 이런 너무 유명해지시기 전에 싸인이라도 어떻게 한 장...
- 이제 슬슬 1인 출판사들의 입질이 시작되겠군요.
- 그런데 문화일보가 아니라 쿠키뉴스에서 검색이 되는데요.
- 신기하네요. 쿠키뉴스 국민일보가 왜 문화일보로 보였을까여. 음.
-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에드맨 님의 가장 큰 Edge 라고 생각해요. Good Luck. :)
- 격려 감사합니다. 왠지 한국영화가 몽땅 망하길 바라는 블로거로 보일까봐 걱정입니다;;;
누가 출판해주면 덧글을 남겨주신 님들에게 한권씩 증정하고싶습니다만 입질은 전혀 없습니다 ㅋㅋ - 오옷. 출판하시면 꼭 한권 주세요. 싸인도 꼭꼭 해주셔야 해요! ^ㅅ^
- 저도 살며시 덧글을! ㅋㅋㅋ
애드맨님 화이팅이요~ - <친구가 너무 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말이 서글프네요.
비슷한 처지인 사람으로써, 끄덕끄덕 으쌰으쌰 했지만서도... - 저는 싸인북보다 소녀시대와의 만남에 어떻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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