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전직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재취업(?)

 


얼마 전부터 또 다른 망해가는 영화사에 다니는 중이다. 여기는 서울 강남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무실 임대료가 저렴하고 주차도 쉬운 편인데 맛있는 식당이나 유명한 술집이 별로 없고 매니지먼트 회사들도 없어서 오다가다 연예인 한 명 구경하기가 힘들다.


전철역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철 버스 갈아타며 출퇴근하기도 번거롭고 심지어는 귀찮기까지하다. 근처에는 그 흔하다는 커피빈이나 스타벅스도 없어서 아메리카노 같은 거 하나 마시려면 한참을 걸어갔다와야되길래 3000원짜리 커피를 안 마셔도 잘 살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그냥 타먹는 커피로 입맛을 바꿨다. 화장실에는 비데도 없고 건물에는 청소 아주머니도 없어서 직원들이 번갈아가며 청소를 해야 된다. 지난번 영화사는 지금 다니는 영화사와 비교하면 헐리우드 유니버셜 스튜디오다.


사실은 전에 다니던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경영상 해고를 당한 후 나도 한번 감독을 해보려고 마음 먹었었다. 감독해보라고 시켜주는 사람은 없지만 나 혼자 알아서 대박 시나리오를 한편 쓰고 나면 누군가 알아서 감독을 시켜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나리오 한번 써보겠다고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자꾸 딴 생각이 나고 게임만 하게 되서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아는 분의 아는 분의 아는 분의 친구의 소개로 이 영화사에 오게 됐다.


소문에 의하면 이 영화사의 대표님은 왕년에 대박 영화들에 참여한 적이 있고 집 안에 흘러넘치는 돈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영화사를 차렸다는데 처음 대표님과 미팅한 날 다년간 영화판을 떠돌며 쌓아온 내공으로 대충 사무실 견적을 내보니 이미 망해가는 조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 안에 흘러넘치는 돈이 여기까지는 흘러오지 않은 것 같다. 나야 뭐 어차피 영화사가 평생 직장도 아니고 대박 영화를 만들어서 입신양명하겠다는 꿈도 버린지 오래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다른 일 하기도 귀찮고 그저 대표가 시키는 일 하며 적당히 왔다갔다 하다보면 뭔 수가 생기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밖에 없으니 딱히 불만은 없다.


처음 면접하러 온 날 영화를 한 편도 안 만든 영화사에 나이 어린 직원들이 서너명 보이길래 다들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걸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인턴 직원들이란다. 몇일 후에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고 회사에 나가보니 인원이 줄어 있길래 다들 어디갔냐고 물어보니 그만뒀다고 했다. 알아서 그만둔 인턴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눈치가 빠르기가 쉽지 않은데 조만간 대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고는 작품 개발과 기타 업무 등등을 맡아달라는데 그렇다고 내가 팀장은 아니고 아직은 서로가 서로의 스타일을 모르고 궁합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 급여와 직책 등은 일하는 거 보고 결정하겠다고 한다. 물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집으로>다.


비공식업무일지를 다시 연재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오기도 전에 이미 망해가는 영화사에 한동안 다녀보고 나니 손가락들이 나도 모르게 키보드 위에서 꿈틀거린다. 어차피 이 모든 게 실화가 아니고 인생은 꿈이라고 생각하니 블로그도 즐겁다.

덧글

  •  라엘 2008/01/21 22:17 # 삭제 답글

    이미 득도하신 듯한.... 여튼... 이것 참 취업 축하드린다고 해야할 지...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오육년 전 기억이 스물스물 떠오릅니다... ^ㅅ^
  •  카델 2008/01/21 22:37 # 삭제 답글

    축...축하합니다.
  •  그때그넘 2008/01/22 04:06 # 삭제 답글

    이런 부활을 기다렸다구요.
  •  tommi 2008/01/22 04:34 # 삭제 답글

    비공식업무일지를 영화로 만들어 보시는게 어떨지요.. ^^
  •  네모도리 2008/01/22 09:16 # 삭제 답글

    그러게 이걸 그대로 시나리오로 마든 다음에
    영화보다 시트콤 쪽으로 추진해 보신다면 하이킥보다 대박 낼듯
  •  dARTH jADE 2008/01/22 09:27 # 삭제 답글

    축하합니다. ^^
  •  joyce 2008/01/22 09:38 # 삭제 답글

    '작품 개발과 기타 업무'...
  •  미스타죠 2008/01/22 12:17 # 삭제 답글

    아- 재밌다. 저도 부활을 기다렸습니다.
  •  newt 2008/01/22 14:57 # 삭제 답글 비공개

    마지막 한 줄이 마음을 울리는군요.
  •  알렉스 2008/01/22 16:16 # 삭제 답글

    눈이 제법 온다 싶더니 또 강추위랍니다. 출퇴근길 조심하세요~
    그래도 이제 겨울도 다 갔다네요.
    조만간 애드님께도 그렇게 성큼 봄이 와 있기를 바랍니다.
  •  술과고기 2008/01/22 19:02 # 삭제 답글

    저도 축하해여~
  •  애드맨 2008/01/22 19:14 # 수정 삭제 답글

    다들 감사합니다. 블로그 설명 업데이트했습니다~~^^;;
  •  Lucida 2008/01/23 00:33 # 삭제 답글

    위기가 기회다! 라고 하고 싶어요^^ 올해에도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화이팅~
  •  여차 2008/01/23 02:10 # 삭제 답글

    대표님이 <집으로>에 참여 하셨던 듯...ㅎㅎ
  •  Labyrins 2008/01/23 12:31 # 삭제 답글

    부활하셨군요...^^
  •  zz 2008/01/23 13:11 # 삭제 답글

    잼땅 ㅋㅋㅋ
  •  ㅎ훈이 2008/01/23 14:49 # 삭제 답글

    아.. 조만간 대성하겠다는 문장에서 엄청 웃었습니다. 축하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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