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시나리오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가 나왔다.


어딜 고쳤는지는 알겠는데 그거 몇 군데 고쳤다고 6년째 못 들어가던 작품이 들어가게 될 것 같진 않았다. 자체 모니터 결과 문제점이라고 지적되었던 부분은 여전히 변함없고 감독님이 특별히 신경써서 고친 걸로 보이는 부분은 왜 고쳤는지 의도를 잘 모르겠다. 내가 삐딱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보다 작품 경력이 훨씬 많은 마케팅 팀장도 시나리오 회의 내내 이게 뭐가 재밌다는지 모르겠다는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감독님이 아무리 영화를 오래 전에 시작했더라도 작품 경력은 마케팅 팀장이 훨씬 많고 결정적으로 초대박 작품의 마케팅에도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말빨은 훨씬 강력하다. 대표님도 언제나 마케팅 팀장의 의견을 듣고 뭔가를 결정하는 분위기고 무엇보다 나이트클럽이나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쉽게 말 걸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미인이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한마디로 실세이자 넘버 투인 셈인데 그런 마케팅 팀장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1년 더 각색해야 될 것 같다.


마케팅 팀장은 요즘 관객들 취향이 아니라서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은 전부 수정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감독은 마케팅 팀장이 나가자마자 길게 한숨을 쉬었고 시나리오 회의 내내 대표님이 참석하지 않는 회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피디는 대표님이랑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통화가 안된다며 사무실엔 언제 나오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우리끼리 얘긴데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은 여성 관객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마케팅 팀장의 말대로 작품을 수정하긴 곤란하다며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매니저를 통해 어느 A급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넣어둔 상태고 만약 그 A급 배우가 하겠다고만 하면 또 다른 A급 배우도 캐스팅할 자신이 있으니 일단은 시나리오 각색 방향은 감독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다고 대표님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6년째 각색중인 작품의 시나리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오자 영화사 알바 경험이 있는 모 인턴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씬별 등장인물 감정선과 호감도를 그래프와 도표로 만들어서 메신저로 보내주었다. 이게 바로 예전에 박정우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기획실 직원인가 뭔가 하는 것들은 무슨 논문이라도 쓰듯이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시나리오의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의 바로 그 논문처럼 쓰여진 그래프였다. 그래프가 컬러플하길래 프린트 잉크가 아까웠지만 일단은 수고했다고 칭찬은 해줬는데 감독에게 보여줬다간 개뿔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 사무실 나와서 할 일 없으니까 시나리오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내 컴퓨터 속의 기타 폴더에 곱게 저장해두었다.


6년째 각색중인 감독님은 시나리오 회의가 끝났으니 오랜만에 회포도 풀겸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다들 바쁘다고 몸을 사리는 분위기여서 나도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다. 감독님의 섭섭해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했는데 나도 이젠 늙고 지쳐서 술도 잘 안 받고 심적으로 여유가 없다. 감독님은 본인이 봉준호나 김지운처럼 잘나가는 유명 감독이라면 이런 홀대는 받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술자리에 참석한다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껀수 없는 맹목적인 술자리는 집에 갈 때 허탈할 뿐이다. 나도 요즘 힘들다. 감독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 감독님이 봉준호나 김지운이라면 전직원이 술자리에 참석했을 것이고 대표님도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다. 상상하면 마음만 아프니 여기까지.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간단하게 정리해봤는데 대표는 만나기 힘드니 일단 마케팅 팀장님에게 보여줘봐야겠다.

덧글

  •  A+급감독 2008/03/06 02:28 # 삭제 답글

    그놈의 아이템 말만 말고 블로그에도 오픈해보시게
  •  애드맨 2008/03/06 04:25 # 수정 삭제 답글

    싫어요.
  •  정시퇴근 2008/03/06 10:21 # 삭제 답글

    무엇보다도 상당한 미인이라서...............^^;
  •  땅콩샌드 2008/03/06 16:22 # 삭제 답글

    상당한 미인이라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겠군요.
  •  애드맨 2008/03/06 23:48 # 수정 삭제 답글

    말이 필요없고 비쥬얼만으로도 설득 가능합니다. ㅎㅎ
  •  미스타죠 2008/03/06 23:57 # 삭제 답글

    애드맨님 영화사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시나리오를 보고 싶어요.
  •  애드맨 2008/03/07 23:17 # 수정 삭제 답글

    미스타죠님 // 언제나 변함없는 관심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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