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누구 말이 맞냐

 


얼마 전부터 대표에게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고 들이미는 아이템이 있는데 대표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다수는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고 하고 소수는 정말 재밌으니 딴 회사 가서라도 만들어보라고 한다.


내가 구상한 아이템이라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주제의식도 분명하고 메시지도 있고 지나칠 정도로 상업적이고 드라마틱하고 볼 거리도 많아서 99퍼센트의 확률로 대박이 터질 것만 같아 이 아이템의 가능성을 몰라보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인정사정없는 영화판에서 버티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렇다고 내 돈으로 전액 투자하라면 그럴 능력도 안 되고 그럴 수 있다 해도 1프로의 확률로 망해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역시 망설여진다.


인생을 걸고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상대적으로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시나리오 단계까지는 혼자서 진행을 했지만 메인 투자가 안되서 결국 패밀리 펀드나 프렌드 펀드의 투자로 만들어진 몇 편의 독립(?) 장편 영화들을 알고 있는데 자기 돈 들여서 영화를 만들 때야 스텝들에게 감독님 피디님 소리도 듣고 가끔씩 언론 잡지 등에 독점 영화 자본이 지배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도 실리고 해서 뿌듯하고 보람도 있긴 한데 막상 촬영 다 하고 프린트 떠서 극장에 걸면 3일 이상 상영하기 힘들고 간판 내리고 나면 남는 건 빚 뿐이다. 정말 운이 좋은 경우엔 극히 희박한 확률로 해외 영화제 구경도 다녀올 수 있지만 갔다와봤자 딱히 남는 것도 없으면서 해외 영화제 체류 기간만큼의 이자만큼은 확실하게 불어나 있다.


위와 같은 경우를 한 두번 봐 온 게 아니어서 기본적으로 메인 투자가 안되는 영화는 무리해서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국내 최고의 배급, 투자, 제작사에서 국내 최고의 톱스타 두 명을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도 쪽박을 차는 마당에 내 아이템을 영화로 만들면 그 영화보단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미련을 버리기가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대박이 터질 것만 같고 꼭 영화로 만들어서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긴 하지만 혼자만 좋아서 무리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가 빚더미에 올라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빚 갚느라 고생하고 계신 분들을 생각하면 역시 숙연한 기분에 알아서 자제가 된다. 그 사람들이라고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고 만나서 얘기해보면 다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인데 그래도 안되는 사람은 안 되니 흥행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작년 개봉작 열편 중 아홉편이 쪽박을 차는 가운데 내 아이템은 아홉편의 쪽박찬 영화 대열에도 못 끼었으니 나는 쪽박조차 못차는 바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쪽박차는 영화를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장한 적은 없으니 바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소수지만 내 아이템이 재밌으니 딴 회사 가서라도 만들어보라는 의견이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주변인들에게 모니터를 돌려봤는데 비슷한 대답들이 돌아와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대표 말이 맞는 것 같다.

덧글

  •  SHiN。 2008/02/21 20:58 # 삭제 답글

    으악 마지막 문장이 쇼크로군요..
  •  미스타죠 2008/02/21 21:27 # 삭제 답글

    악 마지막 허무한 반전이군요!!
    혹시 모니터링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대표 말이 틀릴 수도 있잖아요. 므흣.
  •  땅콩샌드 2008/02/21 22:55 # 삭제 답글

    대표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  동감 2008/02/22 00:33 # 삭제 답글

    대표님 말 들으세요.
  •  음메 2008/02/22 00:39 # 삭제 답글

    잘 될 날이 있을거에요..어떤 아이템인지 궁금하네요 ^^ㅎ
  •  정시퇴근 2008/02/22 01:31 # 삭제 답글

    무지무지무지무지무지 공감이 갑니다..........ㅠ.ㅠ 특히 마지막.....
  •  애드맨 2008/02/22 05:59 # 수정 삭제 답글

    SHiN。님 // 놀라셨다면 죄송요.
    미스타죠님 // 격려 감사합니다. 그런데 미스~ 타죠님이세요? 아님 미스타 죠님이세요? ^^;;
    땅콩샌드님 // 동감입니다.
    동감님 // 넵!
    음메님 // 잘 될 날이 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ㅎ;;
    정시퇴근님 //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ㅋㅋ
  •  미스타죠 2008/02/22 10:06 # 삭제 답글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스타 죠입니다. 남자라 죄송;;
  •  술과고기 2008/02/22 11:41 # 삭제 답글

    성공하실거에요!
  •  애드맨 2008/02/23 01:41 # 수정 삭제 답글

    미스타 죠님 // 물어본 제가 더 죄송합니다;; 남자여도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술과고기님 // 성공은 조용히 마음 속으로 했습니다 ㅋㅋ
  •  유니마르 2008/02/23 14:33 # 삭제 답글

    기획뿐만 아니라 자력으로 시나리오까지 개발하셨다니 애드맨님 대단하세요~ ^^ 나중에 이런 시간을 통과해 대표 말이 틀리게 되는 날이 어서빨리 현실화 되셨으면 좋겠네요~~
  •  애드맨 2008/02/23 21:33 # 수정 삭제 답글

    유니마르님 // 대단하긴요;; 감사합니다 ^^
  •  프리조아 2008/02/26 18:56 # 삭제 답글

    어떤아이템인지 궁금하네용- 애니맨님이 쓰신거면 대박 잼있을것 같은뎅^_^}
  •  애드맨 2008/02/26 22:37 # 수정 삭제 답글

    프리조아님 //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흐릅니다 ㅜㅜ
  •  예영 2008/07/11 15:14 # 삭제 답글

    갑자기 실베스터 스탤론이 생각나네요. 전설의 록키 각본~~
    워낙 불확실한 영화계지만, 진짜 훌륭한 각본에다 영화도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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