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당장 케이블용으로 제작할만한 드라마 아이템을 들고 오라고 큰소리를 쳤다.
딱히 이것이 케이블용 드라마 아이템이라고 기획해 둔 건 없고 당장 들고 오라시니까 따로 기획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얼마 전에 미모의 마케팅 팀장님에게 모니터 차원에서 보여줬다가 욕만 진탕 먹고 퇴짜 맞은 자작 시놉시스를 슬쩍 건네드렸다. 물론 그 아이템은 미모의 마케팅 팀장님 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 대부분에게 영화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고 내 컴퓨터 속 기타 폴더 안에 고이 잠자고 있던 폐기처분 직전의 아이템이었다.
대표는 내가 제출한 아이템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건네받고는 하루종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각오로 제출한 나의 자작 시놉시스를 읽고 뭐라고 할지 너무 궁금해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하고 다른 직원들 몰래 개봉하는지조차 몰랐던 영화들의 흥행예상 글을 블로그에 올려가며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결국은 해가 저물 때 쯤 대표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호출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목이 너무 허접해서 좋은 얘기는 못 들을 것만 같았다.
너는 도저히 싹수가 보이지 않으니 니가 제출한 자작 시놉시스 들고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도대체 자기를 뭘로 알고 이딴 걸 아이템이라고 제출했냐, A4용지와 프린트 잉크가 아깝다 그러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살짝 긴장한 상태로 정중한 노크와 함께 대표 방으로 들어갔다.
대표님께서는 창 밖의 석양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숙이고 내가 제출한 시놉시스를 검토하고 계셨는데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고 씩 웃으시더니 이거 한 번 만들어 보자고 잘만 만들면 시청률 좀 나올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꿈만 같았다. 대표님께서는 요즘엔 개나 소나 다 케이블 드라마를 만들고 있고 마침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도 케이블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어서 본인도 한 번 만들어 볼까 생각 중 이었는데 내가 제출한 아이템이 워낙 싹수가 보여서 이걸로 케이블 드라마를 만들어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워낙에 추진력이 강한 분이셔서 당장 다음주까지 아이템을 발전시킬 감독과 작가를 결정하라고 지시하신 후 본인은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한다며 저녁 맛있게 먹고 주말 잘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게 바로 윗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걸까? 윗사람에게 인정받아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가운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반 여자아이들의 인기투표에서 2등을 차지한 이후로는 가장 기분이 좋은 것 같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릴 뻗는다고 요즘 같은 상황에서 백날 영화를 기획해봤자 부질없다는 생각만 들어 무기력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대표님의 오케이 싸인 한 방에 삶의 의욕에 생겼다. 망해가는 영화사, 포르노급 케이블 드라마 제작으로 위기탈출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 텔레비전에서는 대표님이 아는 사람이 운영한다는 케이블 채널이 나오지 않는다. 케이블 드라마면 당연히 OCN, CGV, 슈퍼액션인 줄 알았는데 케이블에도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너무 유유상종인것 같아 걱정이다.
덧글
핀치히터 2008/04/04 20:47 # 삭제 답글
저도 당연히 OCN, CGV, 슈퍼액션인 줄 알았는데 그 외의 케이블 드라마가 방송되는 채널이 어딘가요;; 방영된다고 해도 볼 수가 없겠군요 ㅠㅠ- 무슨채널인가요~ 이니셜만 ㅋㅋㅋ 유유상종에서 웃어버렸어요 죄성-ㅁ-;;
- 핀치히터님 // 앞으로 OCN, CGV, 슈퍼액션이 되고 싶어하는 케이블 채널이랍니다...^^;;
newt님 // 채널 이름 자체가 이니셜이라서요;;;ㅋ 교보문고죽돌이 2008/04/04 20:52 # 삭제 답글
드디어 블로그 정기구독한 보람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드네요 ㅎㅎㅎㅎㅎ- 인기투표에서 2등이라는, 곳 읽다가 뜨거운 커피 쏟았습니다.
한참 웃었네요.
오늘 처음 웃었습니다.
대본은 작가 따로 정하기보다는 애드맨 님이 쓰시면
시청률 더 잘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아니 그 회사 대표님은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뭐하시길래
인터넷에
본인 이야기가 간간히 나오는 이 블로그를 못보신다는 겁니까? - 모르는 척하고 뭐라고 쓰는 지 두고 보는 걸 수도 있다는...흠좀무;;
- e채널이나 뭐 그런 채널같네여ㅋㅋ 여튼 ㅊㅋㅊㅋ
- 아 이번엔 꿈과 만우절은 아니군요! 다행입니다.
작지만 큰 한발자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드맨님 화이팅요!!!!!! - 후배가 마이너 케이블 방송국의 PD인데... 지금 시트콤 쪽 일을 하는 듯. 후훗. 한 번 알아봐야겠군요...
- 그나저나 일단 인정받으셨다니 축하드려요. 이건 픽션이 아닌 현실이길 바래요~
- XTM채널도 사랑을 부탁드려효~
- 케이블이라면 역시 MBC-ESPN 딴단단단단 딴 단 따단 딴단단단단 딴 다다단 딴따다 따라라 라라라라
- 그런데 이 일화 너무 구체적이라 대표님이 방문하시면 바로... 제가 하도 오랫만에 들려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분위기 파악이 안되네요. ^^;;;
애드맨님의 알권리는 통계의 세부통계에 들어가면 석연치 않게 제 이글루가 끼어잇으니 충족되겟지만
야심한 시각에 홀로 야근을 하고 잇는 이따가 사무실 불 다 끄고 계단 내려갈 생각하면 벌써부터 간담이 서늘한 제가
서둘러 작업을 마치고 이메일로 데이타를 좀 쏴주기를 손톱물어뜯으며 집에서 기다리시는 감독님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은 드리고 가야할것 같아서.- 애드맨님 축하드려요!! 꼭 일이 잘 추진되어서 작품이 빛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제작되면 어느 방송사의 어느 드라마인지 알려주세요. 꼭 찾아 보겠습니다. :)
그나저나 초등학교 때 인기투표 이야기가 너무 심금을 울리는군요 ㅎㅎ - 축하드립니다. 이기회에 애드맨님 인생도 확 피시길.
- 정말 축하드립니다. :)
- 제 감으로는 채널 텐인것 같군요.
아니면 통과;;;
오랜만입니다. 전직 연예소속사 직원입니다.
저는 성공할 시나리오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출 능력이 중요하지요.
무난하게 연륜 있는 감독님 잡고 임팩트 있는 신인 연기자 잘 잡아서 대박 한번 터트려 보시길 바랍니다 - 웬지 ㅋㅋ 기뻐요~
- tvn아닐까 싶네요.
- tvn이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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