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원작 추천 회의

 


인턴들과 원작 추천회의를 하다보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회의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는 이 소설이 좋은데 배우는 누가 해줬으면 좋겠고 감독은 이 사람이 딱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다보면 조만간 영화 한편 뚝닥 만들어서 개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한편씩 추천한 뒤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왜 흥행이 잘 될 것 같은지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만으로 회사에서 돈을 주고 점심도 먹여준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얼마나 영화 감상문을 잘 썼는지를 기준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인턴들이 만들기만 하면 대박이라는 원작 소설들을 일주일에 서너편씩 추천하고 있으니 영화사 입장에선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인턴들이 추천하는 모든 원작들을 다 영화로 만들 순 없으니 그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흥행도 잘 될 것 같은 원작 하나를 선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다 보면 분위기가 제법 살벌해질 때도 있다. 모두들 자기가 추천한 원작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엄청 열심히 토론하는데 20대 중초반 여성 인턴의 한마디면 대부분의 회의가 정리가 된다. 아무리 심드렁한 원작 소설이더라도 20대 중초반의 그녀가 한마디하면 관심이 생기고 이거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원작이라도 비호감 요소가 많아 자기 또래의 여자들이 싫어할거라고 한마디하면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로 돌변한다.


나뿐만 아니라 인턴 중에서는 아무도 20대 중초반 여성 인턴의 취향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무조건 예뻐야 여자들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해도 아무도 반론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영화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어서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졌고 알려진 20대 중초반 일반 여성 관객 그 자체이니 그녀가 싫다면 영화로 만들면 안된다.


그녀와는 달리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데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맨 처음 이 얘기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의 취향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가 추천하는 원작 소설들이 덜 유명하기도 하고 한결같이 사회의 더럽고 추악하고 어두운 면을 다룬 것들이어서 특히 여자인턴들에게 언제나 절대적인 외면을 받고 있다. 나름 영화 공부도 많이 한 것 같고 심지도 굳어보여서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부의 길을 걷는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왜 마케팅실 직원같은 영화사 인턴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제 기회가 되면 조용히 불러내서 물어보고 싶다.


원작 추천 회의 초창기엔 해리포터 급의 초베스트셀러들이 추천됐는데 모두가 알만한 초베스트셀러급의 원작 소설들은 이미 판권이 팔렸거나 우리 영화사에서는 판권을 사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니 이제는 다들 추천할만한 원작이 별로 없다고 난리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은 도저히 재미있는 원작 발굴을 못하겠다고 자기가 직접 썼다는 오리지날 시놉시스를 제출했는데 모두들 돌려보고 별로 재미없다고 간만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조금 상처받은 듯 했다.


다음부터 본인이 쓴 오리지날 시놉시스는 추천하지 말라고 메신저로 말해주었다.

덧글

  •  joyce 2008/01/30 09:40 # 삭제 답글

    정말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 같은 소리로군요.
  •  이노윈드 2008/01/30 10:10 # 삭제 답글

    왠지 눈에서 땀이 ㅠ_ㅠ
  •  krzys 2008/01/30 16:19 # 삭제 답글

    좀 그렇네요, 원작 소설 추천이라니요.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제작해서 흥행시킬 능력이 없다는 건지... 에휴. 애처롭습니다.
  •  땅콩샌드 2008/01/30 16:46 # 삭제 답글

    오리지날이 가장 위험하죠. 일본 애니만 해도 오리지날이 성공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별로? 아니 99%
  •  심리 2008/02/02 02:25 # 삭제 답글

    원작 만화나 원작소설은 이미 대중들의 검증을 받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오리지널은 검증을 거치지 않아서 미지수니까요. 훌륭한 원작만화나 원작소설조차 어설픈 각색으로 망쳐버리는 영화 가끔 보지요. 하물며 오리지널은 오죽할까요. 일반 관객 입장에서 각본을 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면 정말 대가라고 할 수 있겠죠.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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