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우정

 

 

간만에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한글 프로그램을 열고 빈문서를 보자마자 한 숨이 나왔다.


오리지날 창작 시나리오도 아니고 내가 창작해낸 번뜩이는 기본 설정 하나로 밀어붙이는 우라까이 짜깁기 시나리오여서 금방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빈문서1를 띄우고 글자를 입력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막장 쌈마이 시나리오라도 6~70장을 글자로 채우려면 2박 3일은 걸리는데 그동안 게임도 못하고 TV도 못 보고 놀러 다니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창작 의욕이 사그라든다. 과거 내가 쓴 시나리오들이 제대로 빛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자격지심에 키보드에 손가락조차 안 올라간다.

그래서 얼마 전에 신생 영화사로부터 무보수로 일단 한번 써와보라는 각색 의뢰를 거절한 후 자택에서 칩거 중인 작가 지망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구상 중인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집에서 마냥 노느니 투자하는 셈 치고 한번 써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았다.


우리가 그냥 남도 아니고 어두운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돈독한 사이니까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도와 나중에 둘 중 하나라도 잘 되면 잘 나가는 넘이 못 나가는 넘을 끌어 주는 밝은 미래를 설계해보자고 제안하니 계약금은 안 줘도 좋으니까 최소한의 진행비만 달라고 한다. 진행비를 받고 쓰면 순수한 의미의 투자가 아니지만 굳이 달라면 주겠는데 얼마면 되겠냐고 물어보자 아무리 적어도 좋으니 자기도 한번 돈이란 걸 받아보고 뭔가를 써보고 싶을 뿐이란다.


친구에게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그리고 회장 겸 CEO인 에릭 슈미트의 연봉이 1달러였다는 얘기를 해주며 우리도 구글처럼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니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겠다고 했다. 친구는 돈이란 걸 받아보고 시나리오를 써 보는 경험이 어떤 건지 너무 궁금하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기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서 올해 안으로 극장에 걸린다는 보장만 있다면 돈 따위는 안 받아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친구의 계좌번호를 받아적은 후 바로 빈문서를 닫고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글의 회장 겸 CEO가 받았던 연봉 1달러보다는 많은 금액을 친구의 계좌로 보내주었다.


사기는 거래에 있어서 신의를 배반하고 거짓말로 속여서 재물 등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 재산 상의 신뢰침탈 행위를 말하고 사기죄의 요건으로서의 기망은 널리 재산상의 거래관계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든 적극적 및 소극적 행위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피해자는 사기꾼을 믿다가 속고, 사기꾼은 피해자의 신뢰를 이용해 속인다는데 어째 남의 얘기 같지가 않지만 우리는 암울한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 나중에 잘 안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옛날엔 내가 술도 많이 샀다.


친구와의 신뢰를 이용한 거래를 마치는 순간 이 바닥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누가 뭐라건 독한 마음 먹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조언해준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의 소식을 들은지 너무 오래됐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이 궁금해서 생각난 김에 전화를 해 보니 핸드폰이 꺼져있다.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보통은 카드 빚 독촉 때문에 핸드폰을 꺼두니까 연락할 일 있으면 문자를 이용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은 없다.


선배는 잘 버티고 있을까?

덧글

  •  나도직원 2008/03/10 00:20 # 삭제 답글

    온에어의 블로그 버전이군요. 영화화 제목으론 크랭크인이 어떨까요? 잘 읽고 갑니다.
  •  비타민 2008/03/10 03:15 # 삭제 답글

    아.... 빈문서를 켰을 때의 압박.... 저 역시 잘 알고 있죠...............
    물론 전 다른 쪽 일이지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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