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알 권리

 

 

아무리 한국영화가 어렵다지만 이대로 넋놓고 있을 순 없어서 기획서, 시놉시스, 시나리오 등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여기 저기 읽어보라고 보내봤는데 약속이나 한 듯 답은 금방 오지 않는다. 다음주에 다시 통화하자는 건 그래도 양반이고 다다다음주에 통화하자는 건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는 뜻일까??


누군가에게 뭔가를 읽어보라고 보냈으면 바로 읽고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답변을 해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나만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도대체 내가 보낸 제안서를 어떻게 봤는지 너무 궁금하고 만약 아직 안 읽었다면 빨리 읽어보라고 재촉이라도 하기 위해 전화를 해 보려다가 문득 예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카이지의 한 장면이 떠올라 차마 전화를 걸지 못했다.


후지모토 노부유키는 도박묵시룩 카이지 1권에서 도박선에 올라탄 막장 인생들이 자기들에겐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질문에 빨리 대답하라고 난동을 부릴 때 극중 등장인물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죽고 싶냐. 쓰레기 같은 놈들! 너희들은 모두 크게 착각하고 있다. 이 세상의 실체를 못 보고 있어. 마치 서너살짜리 어린애처럼 이 세상은 내가 중심이고 바라기만 하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며 돌봐준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 염치도 없이. 어리광을 버려라. 너희들의 어리광 중 제일 심한 것이 지금 막 소리쳤던 그 질문이다. 질문하면 대답이 돌아오는게 당연하다고? 왜 그런식으로 생각하지? 바보같은 놈들. 엄청난 오해들을 하고 있어. 세상이란 것은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하나 대답해 주지 않아. 융자 문제에 있어서의 은행의 태도. 약의 유해문제에 있어서의 보사부의 답변. 그 놈들이 뭔가 중요한 문제에 대답한 적이 있었나? 한번도 없었을 거다. 이건 기업이라서 정부라서가 아냐. 개인도 그래. 어른들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 그게 기본이다. 너희들은 그 기본을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썩고 썩어서 이런 배에 있는 거야. 물론 그 중에는 대답하는 어른도 있지. 하지만 그건 대답하는 측에게 유리한 내용이니까 그렇게 할 뿐이고 그런 걸 믿는다는 건 즉 꼬임에 넘어가고 있다는 거야. 왜 그걸 모르나? 왜 그걸 깨닫지 못하지?


융자 문제에 있어서의 은행의 태도, 약의 유해문제에 있어서의 보사부의 답변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 대한 영화사 혹은 투자사의 반응도 추가다. 사실은 나도 누군가가 뭔가를 읽어보라고 보내주면 답장이 빠른 편은 아니다. 답장을 기다리는 작가나 감독들의 애타는 심정은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알고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하루 이틀 일주 이주 때로는 한달까지 답장을 미루게 되고 심지어는 무시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나조차도 내가 아쉬운 입장이 되서 뭔가를 보내고 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루 빨리 답장을 해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으니 염치가 없긴 하다.


배우DB구축 임무를 성공리에 마친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요즘엔 한가해 보이길래 시나리오 마켓 모니터 임무를 맡겼다. 한 달에 백여편의 새로운 시나리오가 업데이트되는 시나리오 마켓에서 단 한 편의 시나리오도 놓치지 말고 모니터해서 보고하라고 하니까 새로운 일꺼리를 줘서 좋아할 줄 알았더니 조금 귀찮은 기색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도 이제는 망해가는 영화사 생활에 적응이 됐나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마켓에 2만원 내고 시나리오를 올린 수천명의 작가들이야말로 누군가의 대답을 정말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지만 제대로 된 영화사의 대답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알 권리라는 것은 상위 1%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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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joyce 2008/03/11 22:32 # 삭제 답글

    카이지의 저 대사 뭐 불후의 명작이죠.
  •  작가지망양 2008/03/12 01:09 # 삭제 답글

    서늘하군요. 기분이 나빠지는 블로그..
  •  amish 2008/03/12 01:59 # 삭제 답글

    맞는 말이죠.

    120% 인정.
  •  비타민 2008/03/12 04:29 # 삭제 답글

    하하!! 저도 도박묵시룩 카이지의 광팬입니다. 애드맨님 글은 다 살을 후벼파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오늘 글은 유난히 더 심하네요... 너무 슬픕니다... ㅠㅠ
  •  Labyrins 2008/03/12 07:31 # 삭제 답글

    저 역시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광팬입니다. 요즘 애니메이션으로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  푸른 2008/03/12 09:16 # 삭제 답글

    지금 썩고 썩어서 이런 배에 있는 거야.
    -------------------

    명언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  zizi 2008/03/12 13:38 # 삭제 답글

    우와.. 생각하기 싫어지는 진실인가요.
  •  마음씨 2008/03/13 23:44 # 삭제 답글 비공개

    애드맨님 진솔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감사의 뜻으로 저도 취중블로깅 한판 하였습니다.

    역시 솔직함은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데) 진짜 무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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