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6년째 각색중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시나리오는 6년 전에 완성됐고 크랭크인 날짜도 몇 번 잡혔었다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투자가 무산되고 제작사가 도산하고 출연하기로 했던 스타급 배우가 변심하는 바람에 서너곳의 영화사에서 2고 3고 4고...12고...의 각색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작품이다. 몇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화사에서 제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제작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각색 기간이 6년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6년 동안 이미 서너곳의 영화사를 옮겨가며 각색을 해왔기 때문에 시나리오 회의를 한다고 딱히 새로운 대안이 나올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을 순 없으니 내부 모니터 결과를 종합해서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장르적으로 공식처럼 정확한 기획 영화여서 개인적으로는 이렇다 할 불만도 없고 고쳤으면 하는 부분도 없는데 감독, 피디와 함께 시나리오 회의를 해야 하니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왔다.


어찌됐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이니 제작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시나리오 회의를 통해 그 이유를 밝혀내서 각색 방향을 제작 가능하게 새로 잡아줘야 한다지만 보통 이 정도 단계까지 오게 되면 더 이상의 유의미한 각색은 불가능하다.


예상대로 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해 어떤 얘기가 나오든 예전에 다른 영화사에 있을 때 한번씩 들었던 얘기고 그렇게 안해 본 건 아닌데 별로여서 이렇게 썼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도 그럴것이 6년이면 1년에 한편씩만 써도 6편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시간이니 6년 동안 서너곳의 영화사를 거치며 수십명의 기획팀 마케팅팀 제작팀 직원들과 각색 회의를 했으면 영화사 직원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이 연도별로 한번씩은 다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각색 단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의 기획 단계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A급 스타 배우가 이 시나리오에 꽂혀서 노개런티에 자기 돈까지 투자해서 출연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한 각색 회의를 6년이 아니라 10년을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있던 모 인턴은 당돌하게도 그럼 이렇게 이렇게 고치면 될텐데 왜 그렇게 안 고치냐며 노골적으로 답답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은 그렇게도 고쳐봤는데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고 자신의 의도와도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잠시 당황한 모 인턴은 갑자기 화를 내며 그럼 요렇게 저렇게 고치면 되지 않냐고 말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감독이 어이없어 하려고 하자 나이가 지긋한 피디가 능숙하게 모 인턴의 말을 끊고 화제를 바꿔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회의가 끝나고 술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피디는 감독이 예민한 편이라 혈기왕성한 인턴들과의 회의는 부담스러우니 앞으로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앞으로는 이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대표는 지금 시나리오가 어느 배우에게 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6년 동안 각 연도별 A급 배우들에게 한번씩은 시나리오가 다 갔었다고 한다.

덧글

  •  땅콩샌드 2008/02/03 16:06 # 삭제 답글

    원판 불변의 법칙이군요.
  •  달콤베이비 2008/02/03 16:44 # 삭제 답글

    어딜가나 혈기왕성한 이들은 부답스럽죠.
  •  마음씨 2008/02/03 19:28 # 삭제 답글

    인턴들 상상이 되어요.. 그 상황도 그려지구요. ㅎㅎㅎ
    인턴들이 보기에는 저 밥만 축내는 것들...하고 생각하겠지만 어르신들(?) 입장에선 인턴들에게 해주고싶은 말이 천만년해도 남을 정도로 깝깝하겠죠.
    누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 그냥 저런게 사회가 돌아가는 순차인듯 해서 잠시 웃어봤습니다. ^^
  •  심리 2008/02/03 21:34 # 삭제 답글

    기묘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네요. 속사정을 다 아는 감독 입장에서는 인턴의 이야기가 답답하겠군요. 많은 일들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겠지요. 경험이 적은 입장에서는 자신감 만빵이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입장에서는 씁쓸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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