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0일 목요일

불신의 시작

 


인턴들의 불신이 시작됐다.


우리끼리 이 좁은 사무실에서 서로 지지고 볶고 해 봤자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대학교 갓 졸업하고 백지 상태에서 회사에 처음 왔을 때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대학교 중간고사 리포트 내듯 뭐든지 열심히 했지만 대충 다녀보고 나니 예전에 꿈꾸던 생활과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회사에 대한 뒷담화도 듣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영화들이 대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아무리 여기 저기 뒤져봐도 회사에 돈이 들어오는 구멍이 안 보인다. 점점 회사에 대한 회의가 들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이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한 친구는 다른 사람 몰래 가끔씩 잡코리아를 들여다보는데 슬슬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있는 것 같고 또 다른 친구는 지금 이 생활이 그리 싫지는 않은지 웹써핑과 메신저에 열중하며 현재를 즐기고 있다. 집에서 이어폰까지 가져와서 음악 감상에도 열심히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서 나와 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다. 어떤 친구는 회사가 집 같은지 회사 컴퓨터를 개인 컴퓨터 사용하듯 하는데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왠지 연륜이 느껴진다. 남들이 뭘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언제나 느긋하고 별로 아쉬운 것도 없어 보인다. 나이가 제일 많은 친구는 여기서 물러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뭔가 한껀 해보려고 하루 종일 열심히 뭔가 쓰고 읽고 뒤적거리고 이거 괜찮지 않냐며 나에게 물어본다. 의욕이 대단한데 좀 귀찮다.

자연스럽게 원작 추천 회의는 시들해졌다. 초반에는 각자의 기획안에 시키지도 않은 SWOT 분석까지 해가며 자신이 추천한 원작의 강점, 약점, 기회, 위협 등을 일목요연하게 경쟁적으로 프리젠테이션 해댔지만 이제는 A4용지의 반페이지에 원작 아이템의 제목과 네이버에서 검색한 간략한 줄거리만 첨부해서 SWOT 프리젠테이션은 커녕 그냥 이거 재밌지 않냐고 툭 던지고 끝이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기획안을 누군가 별로 재미없다고 말하면 이게 왜 재밌는지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곤 했지만 이젠 아님 말고다. 점심 시간 후엔 다들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우리 회사가 메이저 영화사도 아닌데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진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현재 진행하는 작품도 잘 안되고 있는 마당에 원작 추천을 해봤자 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당연히 별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고 싶겠지..^^;;

이건 절대 우리 회사 얘긴 아닌데 어떤 회사의 대표는 인건비를 전혀 지출하지 않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소문이 있다. 직원을 고용은 하지만 돈은 주지 않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꿈만으로 버티던 직원이 기다리다 지쳐 알아서 회사를 관두면 또 다른 직원을 고용하고 돈은 주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회사에 공짜 직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뭔가 시켜야 된다는 고민은 안 한다. 다들 알아서 창의적으로 잘 놀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직원들도 이러고 놀까?

덧글

  •  충격 2008/02/15 01:35 # 삭제 답글

    월급만 제 때 나온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선 뭔가 굉장히 좋은 환경인 것 같기도 하고(......)
  •  JINN 2008/02/15 05:01 # 삭제 답글

    월급만 제 때....TmT
  •  술과고기 2008/02/15 10:08 # 삭제 답글

    그, 그런거네요...
  •  아카식 2008/02/15 16:38 # 삭제 답글

    씁쓸합니다 참...
  •  땅콩샌드 2008/02/15 22:09 # 삭제 답글

    픽션이군요. 재밌습니다.
  •  라엘 2008/02/16 02:06 # 삭제 답글

    ................................................................................ 잠시 쉬어가기엔 나쁘지 않을 수도 있죠. 인턴들도 다양하네요? ^ㅅ^
  •  돌돌이 2008/02/18 12:27 # 삭제 답글

    돈만주면 뭔들 못......
    그러나 앞으로 영화판에 들어가고자 하는 저같은 사람에게
    애드맨 님의 논픽션 가튼 픽션은 언제나
    기를 죽이지요 ㅎㅎㅎ
  •  비타민 2008/02/18 23:13 # 삭제 답글

    헉.... 픽션이었다니 저 낚인건가요? ㅠㅠ
    어쨌든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회 기다릴께요!! :)
  •  유니마르 2008/02/21 17:31 # 삭제 답글

    인건비를 지출하지 않고 회사를 운영하고 직원이 막대한 희생 끝에 결국 좌절하고 나가면 새로운 인력을 쉽게 다시 채용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저것도 현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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