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떼먹힌 돈

 


영화 하는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남들은 잠이 안오면 술을 마신다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잠이 안 온다. 영화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동안 영화 일을 하다가 떼먹힌 돈이 생각난다. 언제 어느 회사에서 누구와 일을 했을 때 얼마를 떼먹혔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무슨 영화건 초기에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일 한번 같이 해보자는 연락을 받고 한배를 타게 되면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 불안한 영화산업이 마냥 유망해 보이고 그럴듯한 아이템 하나만 있으면 대박도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회의하고 밤을 새가며 시나리오를 쓰며 열심히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진행하는 작품의 투자 유치나 캐스팅 실패가 반복되면 영화사도 돈이 떨어진다. 투자 유치 실패에 장사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없이 버티다 보면 결국 주변에 민폐끼치며 근근히 연명하는 식물 회사가 된다.


문제는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다. 어차피 월급은 없었고 가끔 나오는 쥐꼬리만한 진행비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회사에 돈 없는 걸 아니까 눈치보면서 점심이라도 챙겨주면 고마워하고 가끔 술이라도 사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술이라도 사줄 수 있으면 그나마 대표가 인간성이 좋거나 사정이 괜찮은 경우다.


작품을 접겠다는 최종통보를 받고 빈손으로 집에 오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남은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기는 커녕 회사에 드나들던 차비와 통화료 그리고 기회비용을 계산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삽질이었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온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일 시작하기 전에 약속했던 소정의 계약금도 못받는게 아닌가 싶어 초조해진다. 당장 전화해서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의기투합해서 같이 일하던 정을 생각해서 몇 달 기다려본다.


물론 몇 달 기다려도 연락은 없다. 사실 작품이 엎어지면 그만 두고 나간 사람은 어차피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더 안 챙겨준다. 돈 줄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선 돈 달라는 전화가 와도 돈 없다고 배째고 카드 연체 몇 달째라고 우는 소리 하면 그만이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보며 밀린 급여 받는 법 등을 검색해본다. 제대로 검색을 했다면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친 척하구 인터넷 게시판 여기저기에 XX영화사의 만행이나 파렴치한 XX감독이라는 식의 글을 올리고 싶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한 대부분의 영화인은 돈 몇백쯤은 그냥 포기하고 딴 일 찾아본다.


이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면 떼먹힌돈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게 된다. 증세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술 먹고 집에 들어오면 잠이 올 때까지 떼먹힌 돈을 전부 더한 후 내 돈을 떼먹은 사람이 나한테 잘해준만큼의 금액을 빼고 못해준 만큼을 더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강박증으로 나타난다.

이 블로그에 내 돈 떼먹은 놈들 실명을 공개하면 강박증이 없어질까?

덧글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떼먹힌돈 다 받아내면 최소한 서울에서 전세하나 얻을수있다는게... 떠오릅니다.
    아휴....
  •  애드맨 2007/09/16 20:09 # 답글

    저보다 많으시네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텝 모임

 


성공한 대박 영화의 스텝들은 다시 의기투합해 차기작을 만들거나 보너스를 받으면 종종 술자리도 갖지만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다시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모이는 경우는 망한 영화의 망해가는 제작사에 받을 잔금이 남아 있는 경운데 모여서 대책회의다 뭐다 하며 한참을 토론 하다보면 결국 돈을 줄 책임이 있는데 안주고 버티고 있는 이들에 대한 현란한 뒷담화가 시작된다. 돈을 줄 수 있는데 못 주는 건지 아니면 먹고 죽을래도 땡전 한 푼 없고 빚만 있는건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 총대를 매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되는데 독한 마음 먹고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그래도 언젠가 못 준 돈만큼 챙겨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영화판이 워낙에 좁아 해꼬지나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지간히 닳고 닳은 스텝이 아닌 이상은 희망에 부풀게 된다. 영화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고맙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영화사 대표나 감독 그리고 자기 팀의 오야지 같은 사람의 눈에 들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일단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하면 아무리 말도 안되는 일들이나 거지 같은 일이 벌어져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운다는 캔디처럼 씩씩하게 영화 한 편을 마무리 할 수 있다. 물론 촬영 틈틈이 비슷한 레벨의 스텝들과 끼리 끼리 모여 감독 뒷다마나 오야지 뒷다마를 까기는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뒷다마를 까도 혹독하게 진심으로 까지는 않는다. 영화란 것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대박이라도 나게 되면 그 떡고물을 나눠 갖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 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이 무사히 마무리 되고 제법 많은 개봉관을 잡고 마케팅 비용도 푸짐하게 써서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모두가 기다리던 해피엔딩이다. 개봉 파티는 흥겹고 흥행 대박에 따른 보너스도 나오는데 어찌 감독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촬영 당시엔 개새끼 소새끼하며 욕해도 영화만 대박이 터지면 감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영화가 망하면 다 필요없다. 스텝들끼리 모일 일도 없고 감독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망한 영화의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잡기도 힘든 신용불량자 비스무리한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는 기본이고 스텝들의 뒷담화는 보너스다. 촬영 당시에야 감독님이 지시하면 뒤에서는 씹퉁대지만 어지간하면 다 들어준다. 감독님 지시사항이 바보짓인지 삽질인지에 대한 판단은 개봉 후 흥행 성적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가 망하면 바보같은 감독 새끼가 삽질해서 영화가 망한 셈이기 때문에 욕도 오지게 얻어먹게 된다.


촬영 현장에서 아무리 천사같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듣는 감독이라도 영화가 망하면 아무도 찾지 않지만 영화만 성공하면 아무리 악마 같은 감독이라도 모두의 환영을 받는 완소 감독으로 변신한다. 영화만 성공하면 사이가 안 좋던 스텝도 연말엔 안부 전화하고 싸이월드 방명록에 인사도 남기는 사이가 된다. 술자리에서 만나면 내가 너 싫어해서 그런거 아닌거 알지? 식의 술깨면 낯간지러울 대화도 오고간다.


망한 영화의 스텝 분위기와 망해가는 회사의 직원 분위기는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덧글

  •  검은머리요다 2007/09/15 23:03 # 답글

    아휴... 망하고 망해도 난 좋은 영화만들겠어! 따윈 필요없군요.
  •  애드맨 2007/09/16 02:23 # 답글

    심형래 감독님이 계셔서 별 걱정은 안합니다.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망한 영화 수두룩하게 한 본인입니다만... 그래도 인간하나 보고 친분 쌓는경우도 있어요 ㅜㅜ;
  •  애드맨 2007/09/17 01:39 # 답글

    저도 없진 않아요 ㅋㅋ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기획회의

 

 

나는 우리 대표가 재밌을 것 같다고 건네는 원작 아이템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나의 직속 상사인 황언니도 마찬가지여서 대표님이 영화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도와야 된다고 이미 몇달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기획팀의 대장 황언니가 재밌다고 들이미는 원작 아이템도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 기획팀의 대장 바로 밑의 송언니도 마찬가지여서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기획팀은 황언니, 송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내가 들이미는 아이템을 재밌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송언니나 황언니가 들이미는 아이템이 시시껄렁하다.


기획 회의 자리가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부터 각자의 영화인생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되 버려서 서로가 서로의 아이템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아이템이 최고라고 울부짖는 자리가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누군가 영화화에 가장 적절한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모두가 감동한 다음 그 감동의 힘으로 으쌰으쌰 영화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경운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 않고 누구의 아이템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싸움이 되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을 몇 달 거쳐서인지 황언니와 송언니는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게 되버렸다. 만약 내가 없다면 두 사람은 같이 밥도 안 먹을 분위기다.


오늘 열린 기획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건진 대박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후 그동안 진행 중인 작품 점검을 하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언니가 재밌을 것 같다고 구매한 시나리오를 송언니가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라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송언니의 회사 자금 사정도 안좋은데 그 시나리오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면 안되겠냐는 발언을 들은 황언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하더니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영화 인생을 건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 작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다만 연출하고 싶어하는 감독도 없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다. 이미 여러명에게 돌렸고 모두에게 까인 폐기처분 직전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부터 모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우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컨셉의 시나리오가 캐스팅이 끝났고 크랭크인 날짜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황언니는 괜찮다 별 일 있겠냐라고는 했지만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 작품은 송언니 주장대로 다른 회사에 팔든가 엎는 게 맞다.


나는 중간에서 딱히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말 없이 설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평소에 불만이었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후 살갑게 화해하며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두어시간 회의는 했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템 기획 회의를 몇 달 해본 결과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이템 회의라는게 뜬구름 잡기랑 비슷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아이템도 이창동이나 박찬욱이 하겠다고 들이밀면 바로 메이드 되는 것이고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아이템도 나나 송언니 그리고 황언니가 들이밀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밀양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시나리오를 신인작가가 만들어보겠다고 투자사에 들이밀었다면 귀싸대기 서너대 맞고 영화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영화판이 원래 이런 곳이다.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얘기하는지가 중요한데 우리 기획팀 세명 모두 시장의 신뢰를 얻을만한 검증받은 데이타가 없다. 이래서는 백날 가도 영화 만들기 힘들다. 내가 영화사 사장이라면 기획팀 따윈 거느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이 목표라면 기획팀 일년 운영할 비용으로 A급 감독 한명과 묻지마 계약을 하고 룸싸롱 같은데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게 낫다.


그래서 나는 기획회의가 끝나고 예전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망한 영화의 착한 스텝들과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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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소똥 2007/09/30 22:04 # 삭제 답글

    글이 재미나면서 좀 씁쓸하네요;;
    잘 봤습니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크린경마

 


오늘 하루 방문객이 지난 3개월 방문객 수보다 더 많고 애드센스도 100달러를 훌쩍 돌파해버렸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 사이에 혹시나 고맙게도 누군가 댓글을 달아주지 않으셨을까 확인하기 위해 접속했다가 두자리수로 달린 댓글과 수만명에 이르는 방문객 수를 보고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유입경로는 무심코 올린 다음 블로거뉴스.


하루에 수만명이 방문하는 블로그에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마음 속의 비밀을 털어놓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가 발각될 것 같다. 몇몇 댓글은 영화인이 달아주신 것 같은데 영화판이 좁아서 아마 한 두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일 확률 90프로다. 내가 누군지 알겠더라도 울 사장한테는 모른 척 해주길 바랄 뿐이다.


방문객 수 올려보려고 기를 쓰고 발악할 때는 아무도 안 오더니 마음을 비우고 진솔하게 회사 뒷담화를 늘어놓으니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신다. 들킬까봐 가슴은 두근거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발각될 때까지 일기쓰듯 매일 매일 연재해야겠다. 다행히 회사 사람 누구에게서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어쩌구에 관련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이게 다 신정아 문화일보 올누드 기사 덕분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오후에 예정되었던 회의가 취소되서 시나리오 마켓에 새로 올라온 시나리오와 일본 소설을 검토하며 오후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예전에 잠깐 일하다 진행비 몇 푼 받고 짤린 심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물론 심씨는 아니지만 일단 심작가라고 해 두자.


일이 있어 (근처에 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하지만 별 일이란 없다.) 회사 근처에 왔는데 새로 구상하고 있는 시나리오 얘기도 하고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진행비도 안나오는데 만나면 내가 커피라도 사야되는 분위기라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심작가에게는 공짜술을 포함한 향응을 제공받은 바 있어 쌩깔 수가 없었다. 내 직속 상사인 황언니에게 심작가가 근처에 와서 만나고 오겠다고 했더니 별 영양가도 없는 일에 귀중한 업무시간을 낭비하려 하냐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대충 쌩까고 나왔다.


심작가는 언제나 그렇듯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몇 년 전 ㅇㅇ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한동안은 이 영화사 저 영화사 불려다니며 잘 나가는 듯 했지만 손대는 작품마다 엎어졌고 이제는 더 이상 불러주는 회사도 없는 처지라 그런지 항상 기가 죽어있고 조금은 비굴하게도 보인다.


심작가가 우리 회사와 일하게 된 계기는 내가 추천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지만 사람도 나쁘지 않고 공모전에서 수상했던 작품도 제법 괜찮아 회사에서 진행 중인 작품의 각색 작가로 추천했을때 별 반대는 없었다. 문제는 심작가가 보내준 결과물이 형편없다는 사실. 술과 게임 그리고 도박에 기를 다 뺏겨서인지 마감 하루 전에 대충 끄적인 느낌이고 성의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몇푼 안되는 진행비만 날렸다는 분위기였다. 황언니에게 더 이상 심작가한테는 진행비 못준다는 얘기를 듣고 몇일 후 심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원래 맘이 여려 이런 말은 잘 못하는 편인데 심작가님과 우리 회사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떠듬 떠듬 말을 더듬기 시작하자 눈치 빠른 심작가는 고맙게도 ‘아쉽네요. 언제 술이나 한잔 해요’ 라는 말만 남기고 바로 전화를 끊어주었다.


그 후 한참 연락이 없다가 오늘 회사 근처로 왔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커피숍에 앉아 영화계가 어려워서 힘들어 죽겠다는 얘기를 십여분 나누다가 새로 구상했다는 작품 얘기를 십여분 쯤 한후 (회사에서 관심갖을 가능성 제로) 신정아 누드사진 얘기를 이십분쯤하며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음모론으로 담소를 나누다보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커피도 다 마셨고 길거리 여자 구경도 지겹고 딱히 더 이상 할말도 없어 그만 일어서려는데 자기랑 경마나 하러 가자며 꼬시기 시작했다. 울 회사 근처에 비밀 스크린 경마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거 다 사기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프로 겜블러라 돈을 딸 수 있으니까 자기만 믿으라는 거다. 자기만 따라하면 돈 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그 말을 믿진 않았지만 스크린경마장에 가본적이 한번도 없어 경험삼아 심작가를 따라 스크린경마장에 갔다. 마침 황언니에게 일이 있어 먼저 퇴근한다고 문자가 와서 굳이 사무실에 일찍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담배연기 자욱한 어두컴컴한 스크린경마장에서 심작가는 한시간만에 십이만원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나는 삼만원을 날렸다. 심작가는 오늘은 안되는 날이라며 나한테 집에 갈 차비하게 만원만 꿔달라고 했다. 눈물을 머금고 만원을 꿔주고(돈을 길바닥에 버리는 기분이었다ㅜㅜ) 회사로 돌아왔다.


경마장에서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본 심작가의 뒷모습이 한동안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신용불량이고 빚도 많다는데 아무래도 심작가는 도박 중독인 것 같아 안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지금 심작가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일은 금요일. 일주일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해야되는 주간회의 날이다. 일주일동안 책과 시나리오들을 검토한 결과 대박 아이템은 없었다는 얘기를 지난 주에 이어 또 해야 된다. 입사 초기에는 엄한 아이템이라도 일단 추천하고 봤는데 추천작에 대한 실망이 거듭되자 나의 안목을 의심하기 시작해 이젠 아무 아이템이나 추천하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이 갑갑한데 그래도 내일이 지나면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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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머리요다 2007/09/14 01:43 # 답글

    오~ 이제목을 포털에서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애드님글이었군요~~~~~우와
    영화쪽일을 하시는 군요.. 에고 마음이 아픕니다. 해뜰날이 있을 겁니다.
  •  애드맨 2007/09/14 14:36 # 답글

    반가워요~
  •  노란싹수 2007/12/05 02:44 # 답글

    뒤늦게 와서 애드맨님의 글을 하나 둘 꺼내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글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  환상연인 2008/12/15 22:50 # 삭제 답글

    애드맨님, 비공식업무일지는 대박 아이템이 아닌가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만.
  •  아리스 2010/12/07 23:14 # 삭제 답글

    저도 뒤늦게 블로그를 발견하고 설레는 맘으로 아껴읽고있는 1인입니당
    영화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지고 있는 대학생인데 이런 글만 읽어도 설레네요ㅠㅠ
    부디 최신 글에는 '잘나가는 영화사'이야기가 있길 바라며!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월급이 들어왔다.


영화 투자 제작 배급사를 희망하지만 단 한번도 투자금을 회수한 적이 없는 회사에서 월급이 들어온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같은 일이다. 영화를 제작한 적이 없는 영화사에 다니는 기획팀 직원인 나는 월급을 주는 우리 대표가 그저 고맙구 미안할 뿐이다. 언젠가는 대박 아이템을 발굴 개발해 대표가 투자한 월급의 수백배에 달하는 수익으로 보답하고는 싶지만 영화판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내가 능력이 모자라 과연 그럴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전에는 회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검토한다기 보다는 대충 대충 읽어본다. 그러다 보면 점심 시간이 되고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와 커피 마시고 잡담을 한다. 잡담이 지겨워지면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뉴스를 뒤적이며 대박 아이템을 찾아 헤맨다. 별 아이템이 없다 싶으면 새로 출간된 일본 소설 검토를 시작한다. 이렇게 오후를 보내면 퇴근 시간이 되는데 회사 돈으로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던가 그냥 퇴근을 하는데 보통은 그냥 퇴근을 선택한다. 야근한다고 대박 아이템이 발굴되는 것도 아니고 야근까지 해가면서 할 일도 딱히 없으니 칼퇴근에 대한 미안함은 없어진지 오래다.


이렇게 입사 후 몇 달을 널럴하게 보내고 나니 이젠 슬슬 회사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 대박 아이템 발굴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동안 투자한 작품 크랭크인 소식도 들리지 않고 투자한 작품 시나리오를 읽어봐도 이거 왜 투자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가 없다. 당연히 회사의 미래도 어둡게만 느껴진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을 신생 영화사에서 감독하라구 데려올 돈도 없고 울 대표가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과 친하지도 않은 것 같다. 어둡다.


이 블로그를 우리 회사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회사 사람들이 이 블로그를 보고 내가 썼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오리발을 내밀며 블로그는 폐쇄해 버려야겠지만 신생 영화사 기획실 직원이 한 두명도 아니고 블로그 설명에 절대 실화가 아니라고 써 두었으니 별 탈은 없겠지.


사실은 블로그를 접으려고 했다. 구글 애드센스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였는데 구글 애드센스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계정은 70달러 정도 되는데 100달러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냥 깨끗이 포기했다.


막상 블로그를 폐쇄하려니 문득 어차피 이 블로그에 개인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는 싶었으나 딱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있어 앞으론 그런 이야기들이나 일기처럼 올리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게 됐다.


회사 여직원들 대부분은 싸이월드에 거주하고 있고 나이 많은 직원들은 블로그에 별 관심이 없으며 대표의 인터넷 생활은 네이버와 야후 그리고 이메일 뿐이니 나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내일은 투자금만 받아놓고 진행은 지지부진한 제작사 사람들과 회의가 있다.


캐스팅 어려운 거 뻔히 알고 더 이상의 시나리오 각색도 무의미한 상황이라 별로 할말도 없는데 투자금이 들어갔으니 내버려둘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회의는 해야 되는 분위기다. 아마 시나리오 각색 방향에 대한 얘기나 두서없이 떠들다 말 것이다.


계약금만 챙기고 떠난 A급 작가 아무개씨가 부러울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블로그는 실화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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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  죄다 2007/09/12 22:51 # 답글

      음...꼭 대박 영화 만드시길...
    •  애드맨 2007/09/12 23:26 # 답글

      감사합니다.
    •  Rick 2007/09/13 05:16 # 답글

      세상은 너무 돈돈돈...저예산영화를 만들어 보세요 전 파이같은 영화도 좋던데
      사람들이 너무 획일된 시나리오, 가치만 요구하는 작품을 바래서
      정말 원하는 영화 만들어진것을 못봣습니다..

      그렇다고 노력안한다는 예기는 아닙니다.
      세상은 자신이 요구하는대로 더 벽이 높아지게마련이죠
      대박영화 만드는것도 좋지만, 그만큼 모두가 접할수있는 2000원영화 나왔으면하는 바랍니다.
      그러면 꼭 시장경재만을 탓하지않아도 좋은영화 더많이 볼수있을태니까요..

      참고로 전 만년 이러고 있습니다...가끔 개미눈물만한 보수가 들어오지만
      한사람에 국한되어 돈벌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저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도 많지요..
    •  애드맨 2007/09/13 08:10 # 답글

      노력할께요ㅜㅜ
    •  키리에 2007/09/13 09:26 # 답글

      아 좋네요 이런 솔직한 얘기.. 저도 회사 얘기 이렇게 속시원하게 쓰고 싶은데 행여나 들킬까봐..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서도..
    •  어이쿠 2007/09/13 11:00 # 삭제 답글

      우와 2년전에 제가 했던 일이네요. -_- 얼렁 뛰쳐나오셔야 합니다. ㅜㅜ
    •  애드맨 2007/09/13 22:29 # 답글

      키리에// 감사합니다. 저도 들키면 폐쇄입니다.
      어이쿠// 다들 그런말은 해주는데 나간다고 별 수 없어서요.
    •  netphobia 2007/09/14 19:23 # 답글

      뜨금해요... --;
    •  마에노 2008/06/20 14:09 # 답글

      링크 신고합니다.

      예전글부터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습니다.
    •  사바세계 2008/12/22 20:07 # 답글

      왠지 정말 비현실같군요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가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힘 없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편이지만 보통은 윗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 군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가 딱 그런 캐릭터다. 대학 땐 학생 운동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