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날씨가 좋아서 도서관에 들렀다.
도서관은 회사에서 빠른 걸음으로는 30분 정도 느린 걸음으로는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있는데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봄기운을 만끽하며 걸어갔다왔다. 업무시간 중이었지만 요즘엔 사무실에 일찍 들어가나 한참을 놀다 늦게 들어가나 별 차이가 없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예전부터 없었다. 게다가 6년째 아니 7년째 각색 중인 작품도 진행이 중단된 터라 그나마 일하는 척 할 꺼리조차 줄어들어버렸다. 답답하다. 아마 대표님도 답답할 것이다. 케이블 드라마가 잘 진행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평일 대낮의 도서관이지만 이용객들이 득실거려 빈자리는 없다. 다들 자리에 앉아 두꺼운 책을 펴고 뭔가 열심히 읽고 쓰고 있는데 무슨 공부를 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공무원 시험 준비 같기도 하고 고시 준비 같기도 한데 왠지 한심해보인다. 아마 여기 있는 이용객들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한심하게 볼 것이다.
나는 곧장 소설 칸으로 가서 소설책들을 열심히 뒤적거렸다. 대부분 읽어본 책들이지만 습관적으로 한번씩은 뒤적거리게 된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소설책들을 이리 저리 뒤적거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소설책이나 뒤적이고 있으니 한심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의 시선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발 겉모습만 보고 한심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쯤은 무슨 일 하시는 분인데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소설책들이나 뒤적거리고 있냐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만약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나에게 무슨 일 하시는 분인데 평일 대낮부터 도서관에 와서 소설책들이나 뒤적거리고 계시냐고 물어봐주면 나는 백수나 공무원 시험 준비생 또는 고시생은 아니고 사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데 제작할 영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자료 조사차원에서 도서관에 왔다고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할 것이다. 겉모습만 보고 백수인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아마도 앞으로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란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내가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친한 연예인이 누군지 신기한 듯 물어볼 것이다. 곧이 곧대로 내가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자기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할 것이고 자연스레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환상도 깨질테니 그냥 누구나 알만한 영화들의 제목을 얘기해줄 것이다. 친한 연예인도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그게 누구냐고 물어볼테니 대충 누구나 알만한데 탑스타는 아닌 정도의 연예인 이름을 얘기해 줄 것이다. 이 정도면 제법 그럴 듯할 것이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면 더 이상은 차가운 시선으로 무시하듯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다만 알고보니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매주 필름2.0과 씨네21을 꼼꼼히 읽고 스폰지 회원이고 듀나 영화 게시판에도 자주 들락날락거리고 부산 영화제도 매년 참석하고 한겨레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영화 강좌도 몇 번 들은 경력이 있는 A+급 영화 매니아라면 어설픈 뻥은 금물이다. 뻥치다 들키면 쪽팔려서 이 도서관엔 다시 오지 못한다.
그 때 대표님에게 전화가 왔다. 마침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나로부터 1.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소설 책들을 정리 중이었다. 바로 이때다 싶어 핸드폰을 꺼내들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감독이 어떻고 작가가 어떻고 시나리오가 어떻고 등등 뭔가 심각한 척 하는 표정으로 업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소설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여기는 도서관이니 핸드폰을 끄라고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셨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곧장 핸드폰을 끄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도서관에 올 때처럼 50분 동안 천천히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그래도 업무시간에 너무 자리를 비우는 건 대표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버스를 탔다. 버스로는 도서관에서 사무실까지 10분 정도 걸렸다.
덧글
술과고기 2008/04/12 02:00 # 삭제 답글
자오 2008/04/12 02:00 # 삭제 답글
나도 영화인 2008/04/12 02:05 # 삭제 답글
나도영화인2 2008/04/12 02:13 # 삭제 답글
달콤베이비 2008/04/12 03:51 # 삭제 답글
이렇게 재밌게 글 쓰는 사람도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썪고 있을 수 밖에 없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몸소 실천해 주시고 있잖아요...
결국 이 블로그 자체가 한국 영화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메타 블로그네요.. 허걱..
작가가 없다 없다 그러는데 없는 게 아니에요.
실력자들이 지천에 깔렸죠.
다만 바로 옆에 있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뿐...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애드맨님이 겪어 온 수난은 다들 아시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애드맨님도 회사에선 메이드 될 가능성 없는 아이템만 제출하는 기획실 직원일 뿐이죠.
분명 그 아이템들도 이 블로그만큼 재미있었을 겁니다.
다만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일개 기획팀 직원이 내 놓은 아이템이기에 각 단락별로 대충 한 줄 씩만 읽고 폐기 처분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 바닥이 만만한 곳은 아닌 거 같아요-_-
나는 관객인 2008/04/12 09:11 # 삭제 답글
재밌어요ㅋ 2008/04/12 09:43 # 삭제 답글
http://adman.egloos.com/992071
달빛이야기 2008/04/12 11:08 # 삭제 답글
그릇 2008/04/12 14:28 # 삭제 답글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사서 2008/04/12 15:38 # 삭제 답글
올 들어서만 보르헤스책이 세권이나 사라졌던데..
실장님도 눈치가 이상하셨는지 나보고 책수레라도 끌고가서 감시 하라신다.
내가 아무리 막내라지만, 아직 점심먹은 배도 않꺼졌는데.. 제길..
그런데 이 남자 정체가 뭐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하기 시작한다.
자료가 어떻고, 시나리오가 어떻고.. 과장된 목소리에 심각한 표정까지.. 왠지 내가 들으라고 연기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도 어설프게...
한참을 그렇게 혼자(?) 떠들던 남자는 핸드폰을 끄라는 내 주의를 받고서야 만족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도저히 못참겠다.. 내일은 꽃구경이라도 가야지..
핀치히터 2008/04/12 15:41 # 삭제 답글
애드맨 2008/04/12 18:39 # 수정 삭제 답글
자오님 // 체념은 전공인데 해학은 과찬이셔요 ㅎ;;
나도 영화인님 // 시나리오도 쓰고는 있습니다. 부끄럽네요;;
나도 영화인2님 // 기대>우려 해주세요 ㅎㅎ
krzys님 // 반갑습니다 ^^~~
나는 관객인님 // 블로그 안 관둘께요ㅎㅎ
재밌어요님 // 기억력이 좋으셔요 ^^
달빛이야기님 // ^^~~
그릇님 // 좋은 시 감사합니다.
사서님 // 다 들어주셨군요. 다음 만남이 기대됩니다 ^^~~
핀치히터님 // 요즘 그림체를 다듬고 있습니다. 종종 올리겠습니다 ^^
라엘 2008/04/12 20:54 # 삭제 답글
그리고, 다른 리플러님들도!
최곱니다!
구들장군 2008/04/13 10:18 # 삭제 답글
다른 영화인 2008/04/13 17:18 # 삭제 답글
비타민 2008/04/14 09:57 # 삭제 답글
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중략'편과 같은 로맨스를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노란싹수 2008/04/14 12:36 # 삭제 답글
아무개 2008/04/15 17:27 # 삭제 답글
배가고파 집에와서 혼자 떡볶이를 끓여먹으며 유재석의 놀러와를 낄낄대며 본 후
앤잇굿에 들어와서 글을 읽다보니 한컷 정도에 제가 출현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이렇게 댓글을 남기면서 킥킥대는 제 자신이 약간은 한심스럽긴 하지만
한심한 사람들이 도서관에 가면 저말고도 많으니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재밌는글 많이 올려주세요
영화과 졸업하고 영화판을 보니 한심해서 도서관에서 한심스러운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1인
저도 시나리오는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reposenap 2008/04/25 00:56 # 삭제 답글
저처럼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 사람들 중엔 똑같이 부모님 돈 타서 쓰더라도 학생 신분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가 그냥 백수일 때보다 가오가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ㅎㅎ;
에로거북이 2008/05/30 11:56 # 삭제 답글
.... 백수생활을 6개월째 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
어이없게 원하지 않게 상황이 사람을 일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정신적 황폐감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p.s. 정독도서관 보단 명동의 커피빈이 책읽기는 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