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사다리타기

 


대부분의 영화사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

내가 다니는 영화사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회사 내에서 군것질을 자주 하게 된다. 난 길거리 다니면서 포장마차나 트럭에서 떡볶이나 순대를 사 먹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여직원들은 회사 근처의 포장마차나 트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떡볶이, 순대 그리고 튀김 사먹는걸 매우 좋아한다. 보통 오후 3~4시 사이에 단체로 군것질을 하는데 돈 내는 사람은 사다리타기로 결정된다. 총 열댓명의 직원들이 사다리타기해서 두명 정도가 당첨되는데 나도 그동안 두 번인가 세 번 걸려서 몇 번 군것질 심부름을 갖다 온 기억이 난다.


단골 노점상 떡볶이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떡볶이 5인분, 순대 5인분, 튀김 5인분을 주문하면 이렇다할 객관적인 기준없이 대충 포장해서 주는데 5인분 시킬 때나 3인분 시킬 때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살 때마다 손해보는 기분이다. 한번은 좀 많이 주세요라고 강하게 어필했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무섭게 노려보며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적게 주는게 아닌가. 강하게 어필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다음부터는 군소리없이 주는 만큼만 곱게 포장해서 배달해오곤 한다. 우리 회사 앞 떡볶이집 주인 아주머니는 얌전히 있는 손님에게 그나마 많이 챙겨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회사로 돌아와 떡볶이, 순대, 튀김을 테이블 위에 세팅해 놓으면 각자 업무를 보고 있던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빠른 속도로 먹어치워버린다. 바로 이 때가 회사 생활 중 가장 보람있고 뿌듯한 순간이다. 내가 준비한 간식을 맛있게 먹는 직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회사 생활 잘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니 입사 초기에는 사무실에 먹을 게 많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렸다. 탕비실이라는 곳에 믹스커피가 있고 녹차가 있고 온갖 종류의 과자와 군것질거리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는데 요즘엔 커피와 녹차만 남아 있다.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게 다 한국 영화가 어렵기 때문인걸까?


한국 영화 어려운 거랑 내가 지금 이렇게 도배하듯 블로그에 낙서하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오늘은 월요일이라 주간회의 준비도 해야 되고 진행 중인 작품 시나리오 회의도 해야 되고 미루고 있던 주목할만한 원작 판권도 알아봐야 되는데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번 주에는 그동안 밀린 진행비나 나왔으면 좋겠다. 일단 자비로 쓰고 나중에 영수증 청구하면 준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수상하긴 했는데 역시나 안 나온다. 남의 돈 받아내기가 이렇게 힘들다.


진행비도 안 나오는 마당에 사다리타기도 신중하게 해야겠다.

덧글

  •  Kitano 2007/09/17 13:19 # 답글

    저도 영화를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게다가 제작입니다. -_-;
    아 이 블로그를 어제 우연히 발견했는데..
    글을 읽다보니 우울해지는군요..^^;;;;
    괜히 이 일 선택했나..졸업한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고 어째;;
  •  검은머리요다 2007/09/17 20:09 # 답글

    일단 자비로 영수증 청구,, 아주 구린내가 풀풀납니다요.
  •  tommi 2007/09/18 06:12 # 답글

    입사 초기에는 사무실에 먹을 게 많았었는데 요즘엔 커피와 녹차만 남아 있다. - 같은 회사 이신줄 알았습니다 ㅋㅋ
  •  애드맨 2007/09/18 15:19 # 답글

    kitano//잘 나가는 사람들 블로그를 자주 가세요.^^
    검은머리요다//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tommi//커피는 떨어지기도 합니다. 같은 회사는 아닐거에요.ㅎ
  •  tommi 2007/09/20 12:57 # 답글

    요즘 커피 떨어졌는데 리필이 안되고 있습니다. 같은회사 맞나요?ㅋ
  •  애드맨 2007/09/20 14:30 # 답글

    우리는 리필됐어요 ㅎㅎ
  •  마력덩어리 2007/10/16 21:12 # 답글

    사장님이 블로그 읽으셨군요ㅎㅎㅎ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우유부단한 미래

 


다른 회사 기획팀 직원 한 명과 회사 망하면 뭐 먹고 살 것이냐에 대해 한 시간 정도 메신저로 담소를 나누었다.


우리 둘 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현장을 떠난지도 오래되서 월급도 없는 연출부나 제작부로 새출발하기는 싫고 일천한 경력에 프리랜서 기획 PD랍시고 명함 한 장 달랑 들고 이 영화사 저 영화사 전전할 수는 있지만 비웃음만 살 것이고 누가 갑자기 작가나 감독을 시켜줄 리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기획팀을 축소하면 했지 새로 인력을 충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영화사 기획팀에 들어갈 수도 없다.


결국 계속 월급 받으며 사회생활 하고 싶으면 지금 다니는 회사가 망하지 않기만을 바래야되는데 회사는 망하지 않더라도 기획팀 직원들은 짤릴 수 있기 때문에-실제로도 많이 짤렸고- 최소한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안 짤리고 다닐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았다.


사실 한국 영화계에서 기획 PD는 매우 애매모호한 포지션이라 일찍이 차승재 대표님께서는 한국 영화계에 기획 PD따윈 필요없다고 강의하신 적도 있다. 아이템을 발굴해서 작가를 붙이고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투자사에서 펀딩을 받고 감독을 선정하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기획PD 업무는 현실적으로 역량 있는 영화사 대표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기획팀은 그런 일을 하는 영화사 대표를 보조하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물론 그런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역량있는 기획 PD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하고 역량있는 기획 PD가 영화사를 차리지 않고 남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 분명 뭔가 피치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획팀 직원으로서 경쟁력을 갖고 이 험난한 영화판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아이템 발굴 추천 작업은 독서와 영화 감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우리 같은 놈들의 추천은 20대 초중반 여성의 추천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메리트가 없다. 우리 같은 놈들 백명이 좋다고 환장을 하며 추천해도 20대 초중반 여성 몇 명이 그 아이템에 대해 비호감이라면 게임 오버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사 기획팀 직원은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어떤 영화사는 전직원이 여성인 경우도 있다.


기획팀 직원으로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도 잘 쓸 수 있어야 된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안 만드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기획팀 직원 생활을 하면서 시장에 팔리는 시나리오도 쓸 수 있다면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다. 시나리오 한편만 제대로 팔아도 기획팀 직원 일년 연봉보다는 많이 벌기 때문이다.


이래 저래 답이 나오지 않는 기획팀 직원의 미래에 대해 담소를 나누다보니 결국은 대표에게 잘 보여서 귀여움 받는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결론이 나왔다. 다른 회사 기획팀 직원과의 대화창을 닫은 후 대표에게 사랑받는 방법에 대해 잠시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회사가 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오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덧글

  •  LeAn 2007/10/29 14:46 # 답글

    늘 고민하던 문제이자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문제죠... OTL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시나리오 모니터

 


눈을 뜨자마자 극장에 가서 조조로 한국 영화 한편을 보고 왔다. 왠만한 한국 영화는 시사회로 보는데 요즘엔 개봉하는 한국 영화 수가 너무 많아 시사회로 다 커버를 못 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보고 싶은 영화만 보고 살았는데 영화사 입사 이후엔 대표와의 대화 중 특정 영화 얘기가 나올 때 그 영화 아직 안봤다고 하면 기획하는 사람이 어떻게 개봉 영화를 안 볼 수가 있냐며 화를 내기 때문에 다 챙겨본다.


영화에 대한 꿈만 있던 시절에는 극장에서 바보같은 영화를 보게 되면 극장을 나오면서부터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인터넷 게시판에까지 악평을 남기고 퍼 나르고 했는데 요즘엔 저런 영화라도 만들어서 극장에 걸어봤으면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리 바보같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도 알고보면 대부분 좋은 학교 나오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며 처세에도 능한 사람들이다. 제작사나 투자사에 그런 사람 한둘씩은 꼭 섞여 있다. 영화계에 학벌 인플레 현상이 생긴지는 제법 오래 되서 메이저 투자 제작 배급사에 가면 명문대는 기본이고 유학파도 그냥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다.


그렇다면 왜 그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바보같은 영화를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지는데 그건 집단 지성의 부작용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집단 지성은 그냥 웃자고 한 소리고;; 보통은 그냥 재수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이 모든 건 재수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떤 영화가 바보같은 영화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물론 흥행 성적이다. 정성일, 유지나 등이 활약하던 동숭아트센터에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2만 들던 시절에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예술성이라는게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소리 하면 아무도 안 놀아준다. 특히 요즘 같이 수익률을 따지는 시대에 상업 영화가 예술 영화나 작가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건 사실 굴욕이나 다름없다. 알고 보면 독립, 예술, 작가주의 영화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생계형 영화인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는 회사에서 못 읽고 집으로 가져온 시나리오 몇 편을 읽었다. 작가 혼자 집에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있고 영화사에서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진행하고 있는 시나리오도 있지만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도 역시 운이다. 수백편(?)의 시나리오 중 영화로 만들어지는건 1%도 안 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작법대로 잘 썼다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못 썼다고 안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평가한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평가한 시나리오라고 안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모두가 쓰레기라고 평가한 시나리오도 유력인사 한 명이 좋다고 하면 영화로 만들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유력인사 한 명이 좋게 보면 쓰레기라고 평가했던 사람들도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보며 마음을 바꾸는 일도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평가할 때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눈치를 슬쩍 보게 된다. 특히나 투자 검토 차원에서 회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대표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높게 평가한 시나리오를 대표가 낮게 평가하는 일이 반복되면 나라는 인간 자체도 저평가되기 때문이다.

덧글

  •  미디어몹 2007/09/17 16:42 # 삭제 답글

    애드맨 회원님의 포스트가 금일 오후 05:00에 미디어몹 헤드라인에 링크될 예정입니다. 익일 다음 헤드라인으로 교체될 경우 각 섹션(시사, 문화, 엔조이라이프, IT과학) 페이지로 옮겨져 링크됩니다.
  •  애드맨 2007/09/18 15:19 # 답글

    잘하셨습니다.
  •  하하하 2007/10/29 17:58 # 삭제 답글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그당시 2만이었다고요? 아..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군요^^
  •  노란싹수 2007/12/04 16:08 # 답글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군요. -_-
  •  무명씨 2008/01/10 06:38 # 삭제 답글

    그러고 보니 저도 2만중 하나였군요... 당시 여친이 보러가자 그래서 코아아트홀에 가긴 갔는데 이건 뭐 의자도 없어서 등받이도 없는 간이의자 놓고 보고... 참 오래된 얘기군요.
  •  애드맨 2008/01/10 13:28 # 답글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ㅎㅎ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떼먹힌 돈

 


영화 하는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남들은 잠이 안오면 술을 마신다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잠이 안 온다. 영화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동안 영화 일을 하다가 떼먹힌 돈이 생각난다. 언제 어느 회사에서 누구와 일을 했을 때 얼마를 떼먹혔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무슨 영화건 초기에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일 한번 같이 해보자는 연락을 받고 한배를 타게 되면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 불안한 영화산업이 마냥 유망해 보이고 그럴듯한 아이템 하나만 있으면 대박도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회의하고 밤을 새가며 시나리오를 쓰며 열심히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진행하는 작품의 투자 유치나 캐스팅 실패가 반복되면 영화사도 돈이 떨어진다. 투자 유치 실패에 장사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없이 버티다 보면 결국 주변에 민폐끼치며 근근히 연명하는 식물 회사가 된다.


문제는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다. 어차피 월급은 없었고 가끔 나오는 쥐꼬리만한 진행비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회사에 돈 없는 걸 아니까 눈치보면서 점심이라도 챙겨주면 고마워하고 가끔 술이라도 사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술이라도 사줄 수 있으면 그나마 대표가 인간성이 좋거나 사정이 괜찮은 경우다.


작품을 접겠다는 최종통보를 받고 빈손으로 집에 오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남은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기는 커녕 회사에 드나들던 차비와 통화료 그리고 기회비용을 계산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삽질이었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온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일 시작하기 전에 약속했던 소정의 계약금도 못받는게 아닌가 싶어 초조해진다. 당장 전화해서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의기투합해서 같이 일하던 정을 생각해서 몇 달 기다려본다.


물론 몇 달 기다려도 연락은 없다. 사실 작품이 엎어지면 그만 두고 나간 사람은 어차피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더 안 챙겨준다. 돈 줄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선 돈 달라는 전화가 와도 돈 없다고 배째고 카드 연체 몇 달째라고 우는 소리 하면 그만이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보며 밀린 급여 받는 법 등을 검색해본다. 제대로 검색을 했다면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친 척하구 인터넷 게시판 여기저기에 XX영화사의 만행이나 파렴치한 XX감독이라는 식의 글을 올리고 싶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한 대부분의 영화인은 돈 몇백쯤은 그냥 포기하고 딴 일 찾아본다.


이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면 떼먹힌돈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게 된다. 증세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술 먹고 집에 들어오면 잠이 올 때까지 떼먹힌 돈을 전부 더한 후 내 돈을 떼먹은 사람이 나한테 잘해준만큼의 금액을 빼고 못해준 만큼을 더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강박증으로 나타난다.

이 블로그에 내 돈 떼먹은 놈들 실명을 공개하면 강박증이 없어질까?

덧글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떼먹힌돈 다 받아내면 최소한 서울에서 전세하나 얻을수있다는게... 떠오릅니다.
    아휴....
  •  애드맨 2007/09/16 20:09 # 답글

    저보다 많으시네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텝 모임

 


성공한 대박 영화의 스텝들은 다시 의기투합해 차기작을 만들거나 보너스를 받으면 종종 술자리도 갖지만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다시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모이는 경우는 망한 영화의 망해가는 제작사에 받을 잔금이 남아 있는 경운데 모여서 대책회의다 뭐다 하며 한참을 토론 하다보면 결국 돈을 줄 책임이 있는데 안주고 버티고 있는 이들에 대한 현란한 뒷담화가 시작된다. 돈을 줄 수 있는데 못 주는 건지 아니면 먹고 죽을래도 땡전 한 푼 없고 빚만 있는건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 총대를 매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되는데 독한 마음 먹고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그래도 언젠가 못 준 돈만큼 챙겨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영화판이 워낙에 좁아 해꼬지나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지간히 닳고 닳은 스텝이 아닌 이상은 희망에 부풀게 된다. 영화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고맙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영화사 대표나 감독 그리고 자기 팀의 오야지 같은 사람의 눈에 들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일단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하면 아무리 말도 안되는 일들이나 거지 같은 일이 벌어져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운다는 캔디처럼 씩씩하게 영화 한 편을 마무리 할 수 있다. 물론 촬영 틈틈이 비슷한 레벨의 스텝들과 끼리 끼리 모여 감독 뒷다마나 오야지 뒷다마를 까기는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뒷다마를 까도 혹독하게 진심으로 까지는 않는다. 영화란 것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대박이라도 나게 되면 그 떡고물을 나눠 갖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 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이 무사히 마무리 되고 제법 많은 개봉관을 잡고 마케팅 비용도 푸짐하게 써서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모두가 기다리던 해피엔딩이다. 개봉 파티는 흥겹고 흥행 대박에 따른 보너스도 나오는데 어찌 감독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촬영 당시엔 개새끼 소새끼하며 욕해도 영화만 대박이 터지면 감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영화가 망하면 다 필요없다. 스텝들끼리 모일 일도 없고 감독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망한 영화의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잡기도 힘든 신용불량자 비스무리한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는 기본이고 스텝들의 뒷담화는 보너스다. 촬영 당시에야 감독님이 지시하면 뒤에서는 씹퉁대지만 어지간하면 다 들어준다. 감독님 지시사항이 바보짓인지 삽질인지에 대한 판단은 개봉 후 흥행 성적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가 망하면 바보같은 감독 새끼가 삽질해서 영화가 망한 셈이기 때문에 욕도 오지게 얻어먹게 된다.


촬영 현장에서 아무리 천사같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듣는 감독이라도 영화가 망하면 아무도 찾지 않지만 영화만 성공하면 아무리 악마 같은 감독이라도 모두의 환영을 받는 완소 감독으로 변신한다. 영화만 성공하면 사이가 안 좋던 스텝도 연말엔 안부 전화하고 싸이월드 방명록에 인사도 남기는 사이가 된다. 술자리에서 만나면 내가 너 싫어해서 그런거 아닌거 알지? 식의 술깨면 낯간지러울 대화도 오고간다.


망한 영화의 스텝 분위기와 망해가는 회사의 직원 분위기는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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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머리요다 2007/09/15 23:03 # 답글

    아휴... 망하고 망해도 난 좋은 영화만들겠어! 따윈 필요없군요.
  •  애드맨 2007/09/16 02:23 # 답글

    심형래 감독님이 계셔서 별 걱정은 안합니다.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망한 영화 수두룩하게 한 본인입니다만... 그래도 인간하나 보고 친분 쌓는경우도 있어요 ㅜㅜ;
  •  애드맨 2007/09/17 01:39 # 답글

    저도 없진 않아요 ㅋㅋ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기획회의

 

 

나는 우리 대표가 재밌을 것 같다고 건네는 원작 아이템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나의 직속 상사인 황언니도 마찬가지여서 대표님이 영화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도와야 된다고 이미 몇달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기획팀의 대장 황언니가 재밌다고 들이미는 원작 아이템도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 기획팀의 대장 바로 밑의 송언니도 마찬가지여서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기획팀은 황언니, 송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내가 들이미는 아이템을 재밌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송언니나 황언니가 들이미는 아이템이 시시껄렁하다.


기획 회의 자리가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부터 각자의 영화인생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되 버려서 서로가 서로의 아이템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아이템이 최고라고 울부짖는 자리가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누군가 영화화에 가장 적절한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모두가 감동한 다음 그 감동의 힘으로 으쌰으쌰 영화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경운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 않고 누구의 아이템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싸움이 되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을 몇 달 거쳐서인지 황언니와 송언니는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게 되버렸다. 만약 내가 없다면 두 사람은 같이 밥도 안 먹을 분위기다.


오늘 열린 기획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건진 대박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후 그동안 진행 중인 작품 점검을 하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언니가 재밌을 것 같다고 구매한 시나리오를 송언니가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라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송언니의 회사 자금 사정도 안좋은데 그 시나리오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면 안되겠냐는 발언을 들은 황언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하더니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영화 인생을 건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 작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다만 연출하고 싶어하는 감독도 없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다. 이미 여러명에게 돌렸고 모두에게 까인 폐기처분 직전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부터 모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우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컨셉의 시나리오가 캐스팅이 끝났고 크랭크인 날짜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황언니는 괜찮다 별 일 있겠냐라고는 했지만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 작품은 송언니 주장대로 다른 회사에 팔든가 엎는 게 맞다.


나는 중간에서 딱히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말 없이 설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평소에 불만이었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후 살갑게 화해하며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두어시간 회의는 했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템 기획 회의를 몇 달 해본 결과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이템 회의라는게 뜬구름 잡기랑 비슷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아이템도 이창동이나 박찬욱이 하겠다고 들이밀면 바로 메이드 되는 것이고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아이템도 나나 송언니 그리고 황언니가 들이밀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밀양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시나리오를 신인작가가 만들어보겠다고 투자사에 들이밀었다면 귀싸대기 서너대 맞고 영화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영화판이 원래 이런 곳이다.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얘기하는지가 중요한데 우리 기획팀 세명 모두 시장의 신뢰를 얻을만한 검증받은 데이타가 없다. 이래서는 백날 가도 영화 만들기 힘들다. 내가 영화사 사장이라면 기획팀 따윈 거느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이 목표라면 기획팀 일년 운영할 비용으로 A급 감독 한명과 묻지마 계약을 하고 룸싸롱 같은데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게 낫다.


그래서 나는 기획회의가 끝나고 예전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망한 영화의 착한 스텝들과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만세!

덧글

  •  염소똥 2007/09/30 22:04 # 삭제 답글

    글이 재미나면서 좀 씁쓸하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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