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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기획회의

 

 

나는 우리 대표가 재밌을 것 같다고 건네는 원작 아이템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나의 직속 상사인 황언니도 마찬가지여서 대표님이 영화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도와야 된다고 이미 몇달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기획팀의 대장 황언니가 재밌다고 들이미는 원작 아이템도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 기획팀의 대장 바로 밑의 송언니도 마찬가지여서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기획팀은 황언니, 송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내가 들이미는 아이템을 재밌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송언니나 황언니가 들이미는 아이템이 시시껄렁하다.


기획 회의 자리가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부터 각자의 영화인생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되 버려서 서로가 서로의 아이템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아이템이 최고라고 울부짖는 자리가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누군가 영화화에 가장 적절한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모두가 감동한 다음 그 감동의 힘으로 으쌰으쌰 영화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경운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 않고 누구의 아이템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싸움이 되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을 몇 달 거쳐서인지 황언니와 송언니는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게 되버렸다. 만약 내가 없다면 두 사람은 같이 밥도 안 먹을 분위기다.


오늘 열린 기획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건진 대박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후 그동안 진행 중인 작품 점검을 하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언니가 재밌을 것 같다고 구매한 시나리오를 송언니가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라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송언니의 회사 자금 사정도 안좋은데 그 시나리오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면 안되겠냐는 발언을 들은 황언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하더니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영화 인생을 건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 작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다만 연출하고 싶어하는 감독도 없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다. 이미 여러명에게 돌렸고 모두에게 까인 폐기처분 직전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부터 모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우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컨셉의 시나리오가 캐스팅이 끝났고 크랭크인 날짜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황언니는 괜찮다 별 일 있겠냐라고는 했지만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 작품은 송언니 주장대로 다른 회사에 팔든가 엎는 게 맞다.


나는 중간에서 딱히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말 없이 설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평소에 불만이었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후 살갑게 화해하며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두어시간 회의는 했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템 기획 회의를 몇 달 해본 결과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이템 회의라는게 뜬구름 잡기랑 비슷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아이템도 이창동이나 박찬욱이 하겠다고 들이밀면 바로 메이드 되는 것이고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아이템도 나나 송언니 그리고 황언니가 들이밀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밀양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시나리오를 신인작가가 만들어보겠다고 투자사에 들이밀었다면 귀싸대기 서너대 맞고 영화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영화판이 원래 이런 곳이다.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얘기하는지가 중요한데 우리 기획팀 세명 모두 시장의 신뢰를 얻을만한 검증받은 데이타가 없다. 이래서는 백날 가도 영화 만들기 힘들다. 내가 영화사 사장이라면 기획팀 따윈 거느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이 목표라면 기획팀 일년 운영할 비용으로 A급 감독 한명과 묻지마 계약을 하고 룸싸롱 같은데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게 낫다.


그래서 나는 기획회의가 끝나고 예전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망한 영화의 착한 스텝들과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만세!

덧글

  •  염소똥 2007/09/30 22:04 # 삭제 답글

    글이 재미나면서 좀 씁쓸하네요;;
    잘 봤습니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월급이 들어왔다.


영화 투자 제작 배급사를 희망하지만 단 한번도 투자금을 회수한 적이 없는 회사에서 월급이 들어온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같은 일이다. 영화를 제작한 적이 없는 영화사에 다니는 기획팀 직원인 나는 월급을 주는 우리 대표가 그저 고맙구 미안할 뿐이다. 언젠가는 대박 아이템을 발굴 개발해 대표가 투자한 월급의 수백배에 달하는 수익으로 보답하고는 싶지만 영화판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내가 능력이 모자라 과연 그럴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전에는 회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검토한다기 보다는 대충 대충 읽어본다. 그러다 보면 점심 시간이 되고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와 커피 마시고 잡담을 한다. 잡담이 지겨워지면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뉴스를 뒤적이며 대박 아이템을 찾아 헤맨다. 별 아이템이 없다 싶으면 새로 출간된 일본 소설 검토를 시작한다. 이렇게 오후를 보내면 퇴근 시간이 되는데 회사 돈으로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던가 그냥 퇴근을 하는데 보통은 그냥 퇴근을 선택한다. 야근한다고 대박 아이템이 발굴되는 것도 아니고 야근까지 해가면서 할 일도 딱히 없으니 칼퇴근에 대한 미안함은 없어진지 오래다.


이렇게 입사 후 몇 달을 널럴하게 보내고 나니 이젠 슬슬 회사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 대박 아이템 발굴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동안 투자한 작품 크랭크인 소식도 들리지 않고 투자한 작품 시나리오를 읽어봐도 이거 왜 투자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가 없다. 당연히 회사의 미래도 어둡게만 느껴진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을 신생 영화사에서 감독하라구 데려올 돈도 없고 울 대표가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과 친하지도 않은 것 같다. 어둡다.


이 블로그를 우리 회사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회사 사람들이 이 블로그를 보고 내가 썼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오리발을 내밀며 블로그는 폐쇄해 버려야겠지만 신생 영화사 기획실 직원이 한 두명도 아니고 블로그 설명에 절대 실화가 아니라고 써 두었으니 별 탈은 없겠지.


사실은 블로그를 접으려고 했다. 구글 애드센스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였는데 구글 애드센스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계정은 70달러 정도 되는데 100달러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냥 깨끗이 포기했다.


막상 블로그를 폐쇄하려니 문득 어차피 이 블로그에 개인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는 싶었으나 딱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있어 앞으론 그런 이야기들이나 일기처럼 올리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게 됐다.


회사 여직원들 대부분은 싸이월드에 거주하고 있고 나이 많은 직원들은 블로그에 별 관심이 없으며 대표의 인터넷 생활은 네이버와 야후 그리고 이메일 뿐이니 나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내일은 투자금만 받아놓고 진행은 지지부진한 제작사 사람들과 회의가 있다.


캐스팅 어려운 거 뻔히 알고 더 이상의 시나리오 각색도 무의미한 상황이라 별로 할말도 없는데 투자금이 들어갔으니 내버려둘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회의는 해야 되는 분위기다. 아마 시나리오 각색 방향에 대한 얘기나 두서없이 떠들다 말 것이다.


계약금만 챙기고 떠난 A급 작가 아무개씨가 부러울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블로그는 실화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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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  죄다 2007/09/12 22:51 # 답글

      음...꼭 대박 영화 만드시길...
    •  애드맨 2007/09/12 23:26 # 답글

      감사합니다.
    •  Rick 2007/09/13 05:16 # 답글

      세상은 너무 돈돈돈...저예산영화를 만들어 보세요 전 파이같은 영화도 좋던데
      사람들이 너무 획일된 시나리오, 가치만 요구하는 작품을 바래서
      정말 원하는 영화 만들어진것을 못봣습니다..

      그렇다고 노력안한다는 예기는 아닙니다.
      세상은 자신이 요구하는대로 더 벽이 높아지게마련이죠
      대박영화 만드는것도 좋지만, 그만큼 모두가 접할수있는 2000원영화 나왔으면하는 바랍니다.
      그러면 꼭 시장경재만을 탓하지않아도 좋은영화 더많이 볼수있을태니까요..

      참고로 전 만년 이러고 있습니다...가끔 개미눈물만한 보수가 들어오지만
      한사람에 국한되어 돈벌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저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도 많지요..
    •  애드맨 2007/09/13 08:10 # 답글

      노력할께요ㅜㅜ
    •  키리에 2007/09/13 09:26 # 답글

      아 좋네요 이런 솔직한 얘기.. 저도 회사 얘기 이렇게 속시원하게 쓰고 싶은데 행여나 들킬까봐..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서도..
    •  어이쿠 2007/09/13 11:00 # 삭제 답글

      우와 2년전에 제가 했던 일이네요. -_- 얼렁 뛰쳐나오셔야 합니다. ㅜㅜ
    •  애드맨 2007/09/13 22:29 # 답글

      키리에// 감사합니다. 저도 들키면 폐쇄입니다.
      어이쿠// 다들 그런말은 해주는데 나간다고 별 수 없어서요.
    •  netphobia 2007/09/14 19:23 # 답글

      뜨금해요... --;
    •  마에노 2008/06/20 14:09 # 답글

      링크 신고합니다.

      예전글부터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습니다.
    •  사바세계 2008/12/22 20:07 # 답글

      왠지 정말 비현실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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