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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6일 목요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정직한 발렛파킹

 


회사가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주차난이 심각하다. 건물 앞 좁은 주차장은 언제나 만원이고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유료 주차장은 비싸서 회사에 손님이 오면 직원 중 누군가는 손님차 키를 받아 주차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내가 바로 울 회사 발렛파킹 전문 요원이다.


대표차는 물론이고 잠깐씩 왔다갔다 하는 손님들 차를 주변 건물 주차 관리 요원들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 빼박이 해주면서 하루를 보내는게 나의 주요 업무이기도 한데 한번은 대표가 새로 뽑은 차를 끌고 좁은 골목길을 후진하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차의 빽미러를 꺽은적이 있다. 아 씨바 X됐다 싶어 차에서 내려 대표차에 혹시나 기스라도 나지 않았나 싶어 차를 살펴보니 역시나 1cm 길이의 기스가 나 있었다. 뒤에서 오는 차는 빽미러가 꺽여 있고 뽑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표차는 기스가 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일단 빽미러 꺽인 차가 국산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 차 주인 아줌마의 분노를 누그러뜨린 다음 가까운 카센터에서 기스 땜질 작업을 했다. 기스 땜질 작업이 티가 많이 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요리 보고 저리봐도 깜쪽 같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물론 빽미러 꺽은 비용은 청구하지 않았고 사고 사실도 보고하지 않았다. 혹시나 대표가 눈치라도 채면 어쩌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도 불편해 그냥 자수해서 광명찾으려고 했지만 카센터 주인 아저씨가 땜질이 깜쪽같아 아무도 눈치 못 챌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자신만 믿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만 믿고 시침 뚝 떼고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무사히 몇 달이 흘렀다.


차라리 가슴 졸이지 말고 정직하게 사고 사실을 보고 했다면 오히려 나의 정직성이 높게 평가되어 대표에게 더욱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망상도 해봤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그냥 모른척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 이후 대표 자신이 좁은 골목길을 운전하다 꾸준히 차에 기스를 내 주어서 내가 낸 기스 정도는 새발에 피 정도 밖에 되지 않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이 동네가 국산차보다 외제차가 많고 길은 좁은데 차가 많아 언제 긁혀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고 누가 긁고 도망가도 그러려니 하고 만다. 막말로 기스를 내놓고 내가 한 거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어도 되는 분위기지만 내가 찌질하긴 해도 양아치는 아니다.


하루는 평소 별 볼일 없어보여 무시하던 연예인이 회사에 차를 끌고 왔길래 주차 관리 해주러 내려가봤더니 b자로 시작하는 고가의 외제차가 서 있는게 아닌가. 나보다 공부도 못했을 테고 인기도 별로 없는 연예인은 외제차 끌고 다니고 나는 그 외제차 빼박이 신세라니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원망스러웠지만 발렛파킹 전문 요원으로서 회사의 이름을 걸고 프로페셔널답게 깔끔하게 주차 관리를 해주었다.


물론 팁은 없었다.

덧글

  •  acid 2007/09/18 15:23 # 답글

    아무래도 저희 회사 근처 같은데... (저도 영화삽니다)
  •  애드맨 2007/09/18 15:45 # 답글

    반갑습니다.^^
  •  Kitano 2007/09/19 01:50 # 답글

    근데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시면 대표님이 아시는 거 아닙니까 ㄷㄷㄷ;;
  •  애드맨 2007/09/19 01:52 # 답글

    울 대표는 네이버와 이메일 밖에 몰라요.ㅎㅎㅎ;;
  •  빈틈씨 2007/09/19 09:31 # 답글

    너무 재밌어요 ^^ 잘 보고 갑니다
  •  tommi 2007/09/20 12:57 # 답글

    하하하하하하 너무 재밌어요
  •  아슈 2007/10/23 15:50 # 답글

    어쩌다 발견했는데, 일이 많아도 역주행을 멈출수가 없어요.
    제 주무대(?) 와 비슷한 동네라 남 같지 않은데
    맨 마지막 문단은 정말.. 가슴에서 피눈물이 날 정도로 정곡입니다..
  •  애드맨 2007/10/23 19:52 # 답글

    아슈님 // 주무대가 비슷하다니 오며가며 마주쳤겠군요. 일방은 꼭 지키고 양보운전하자구요..^^
  •  LeAn 2007/10/29 14:43 # 답글

    역주행을 멈출수 없다는 말에 200% 동감.
    글을 너무 잘 쓰셔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우유부단한 미래

 


다른 회사 기획팀 직원 한 명과 회사 망하면 뭐 먹고 살 것이냐에 대해 한 시간 정도 메신저로 담소를 나누었다.


우리 둘 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현장을 떠난지도 오래되서 월급도 없는 연출부나 제작부로 새출발하기는 싫고 일천한 경력에 프리랜서 기획 PD랍시고 명함 한 장 달랑 들고 이 영화사 저 영화사 전전할 수는 있지만 비웃음만 살 것이고 누가 갑자기 작가나 감독을 시켜줄 리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기획팀을 축소하면 했지 새로 인력을 충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다른 영화사 기획팀에 들어갈 수도 없다.


결국 계속 월급 받으며 사회생활 하고 싶으면 지금 다니는 회사가 망하지 않기만을 바래야되는데 회사는 망하지 않더라도 기획팀 직원들은 짤릴 수 있기 때문에-실제로도 많이 짤렸고- 최소한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안 짤리고 다닐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았다.


사실 한국 영화계에서 기획 PD는 매우 애매모호한 포지션이라 일찍이 차승재 대표님께서는 한국 영화계에 기획 PD따윈 필요없다고 강의하신 적도 있다. 아이템을 발굴해서 작가를 붙이고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투자사에서 펀딩을 받고 감독을 선정하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기획PD 업무는 현실적으로 역량 있는 영화사 대표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기획팀은 그런 일을 하는 영화사 대표를 보조하는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물론 그런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역량있는 기획 PD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하고 역량있는 기획 PD가 영화사를 차리지 않고 남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 분명 뭔가 피치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획팀 직원으로서 경쟁력을 갖고 이 험난한 영화판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아이템 발굴 추천 작업은 독서와 영화 감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우리 같은 놈들의 추천은 20대 초중반 여성의 추천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메리트가 없다. 우리 같은 놈들 백명이 좋다고 환장을 하며 추천해도 20대 초중반 여성 몇 명이 그 아이템에 대해 비호감이라면 게임 오버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사 기획팀 직원은 젊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어떤 영화사는 전직원이 여성인 경우도 있다.


기획팀 직원으로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시나리오도 잘 쓸 수 있어야 된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안 만드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기획팀 직원 생활을 하면서 시장에 팔리는 시나리오도 쓸 수 있다면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다. 시나리오 한편만 제대로 팔아도 기획팀 직원 일년 연봉보다는 많이 벌기 때문이다.


이래 저래 답이 나오지 않는 기획팀 직원의 미래에 대해 담소를 나누다보니 결국은 대표에게 잘 보여서 귀여움 받는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결론이 나왔다. 다른 회사 기획팀 직원과의 대화창을 닫은 후 대표에게 사랑받는 방법에 대해 잠시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회사가 망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오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덧글

  •  LeAn 2007/10/29 14:46 # 답글

    늘 고민하던 문제이자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문제죠... OTL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떼먹힌 돈

 


영화 하는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남들은 잠이 안오면 술을 마신다는데 나는 술을 마시면 잠이 안 온다. 영화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동안 영화 일을 하다가 떼먹힌 돈이 생각난다. 언제 어느 회사에서 누구와 일을 했을 때 얼마를 떼먹혔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무슨 영화건 초기에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일 한번 같이 해보자는 연락을 받고 한배를 타게 되면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신한다. 불안한 영화산업이 마냥 유망해 보이고 그럴듯한 아이템 하나만 있으면 대박도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회의하고 밤을 새가며 시나리오를 쓰며 열심히 꿈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진행하는 작품의 투자 유치나 캐스팅 실패가 반복되면 영화사도 돈이 떨어진다. 투자 유치 실패에 장사없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없이 버티다 보면 결국 주변에 민폐끼치며 근근히 연명하는 식물 회사가 된다.


문제는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다. 어차피 월급은 없었고 가끔 나오는 쥐꼬리만한 진행비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회사에 돈 없는 걸 아니까 눈치보면서 점심이라도 챙겨주면 고마워하고 가끔 술이라도 사주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술이라도 사줄 수 있으면 그나마 대표가 인간성이 좋거나 사정이 괜찮은 경우다.


작품을 접겠다는 최종통보를 받고 빈손으로 집에 오면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남의 말만 믿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남은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기는 커녕 회사에 드나들던 차비와 통화료 그리고 기회비용을 계산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삽질이었다는 손익계산서가 나온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일 시작하기 전에 약속했던 소정의 계약금도 못받는게 아닌가 싶어 초조해진다. 당장 전화해서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의기투합해서 같이 일하던 정을 생각해서 몇 달 기다려본다.


물론 몇 달 기다려도 연락은 없다. 사실 작품이 엎어지면 그만 두고 나간 사람은 어차피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더 안 챙겨준다. 돈 줄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선 돈 달라는 전화가 와도 돈 없다고 배째고 카드 연체 몇 달째라고 우는 소리 하면 그만이다.


이제는 결단의 시간이다.


인터넷을 여기저기 뒤져보며 밀린 급여 받는 법 등을 검색해본다. 제대로 검색을 했다면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친 척하구 인터넷 게시판 여기저기에 XX영화사의 만행이나 파렴치한 XX감독이라는 식의 글을 올리고 싶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한 대부분의 영화인은 돈 몇백쯤은 그냥 포기하고 딴 일 찾아본다.


이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면 떼먹힌돈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게 된다. 증세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술 먹고 집에 들어오면 잠이 올 때까지 떼먹힌 돈을 전부 더한 후 내 돈을 떼먹은 사람이 나한테 잘해준만큼의 금액을 빼고 못해준 만큼을 더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강박증으로 나타난다.

이 블로그에 내 돈 떼먹은 놈들 실명을 공개하면 강박증이 없어질까?

덧글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떼먹힌돈 다 받아내면 최소한 서울에서 전세하나 얻을수있다는게... 떠오릅니다.
    아휴....
  •  애드맨 2007/09/16 20:09 # 답글

    저보다 많으시네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텝 모임

 


성공한 대박 영화의 스텝들은 다시 의기투합해 차기작을 만들거나 보너스를 받으면 종종 술자리도 갖지만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다시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모이는 경우는 망한 영화의 망해가는 제작사에 받을 잔금이 남아 있는 경운데 모여서 대책회의다 뭐다 하며 한참을 토론 하다보면 결국 돈을 줄 책임이 있는데 안주고 버티고 있는 이들에 대한 현란한 뒷담화가 시작된다. 돈을 줄 수 있는데 못 주는 건지 아니면 먹고 죽을래도 땡전 한 푼 없고 빚만 있는건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 총대를 매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되는데 독한 마음 먹고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그래도 언젠가 못 준 돈만큼 챙겨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영화판이 워낙에 좁아 해꼬지나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어지간히 닳고 닳은 스텝이 아닌 이상은 희망에 부풀게 된다. 영화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고맙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영화사 대표나 감독 그리고 자기 팀의 오야지 같은 사람의 눈에 들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일단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하면 아무리 말도 안되는 일들이나 거지 같은 일이 벌어져도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운다는 캔디처럼 씩씩하게 영화 한 편을 마무리 할 수 있다. 물론 촬영 틈틈이 비슷한 레벨의 스텝들과 끼리 끼리 모여 감독 뒷다마나 오야지 뒷다마를 까기는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뒷다마를 까도 혹독하게 진심으로 까지는 않는다. 영화란 것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대박이라도 나게 되면 그 떡고물을 나눠 갖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 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이 무사히 마무리 되고 제법 많은 개봉관을 잡고 마케팅 비용도 푸짐하게 써서 영화가 대박이 난다면 모두가 기다리던 해피엔딩이다. 개봉 파티는 흥겹고 흥행 대박에 따른 보너스도 나오는데 어찌 감독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촬영 당시엔 개새끼 소새끼하며 욕해도 영화만 대박이 터지면 감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영화가 망하면 다 필요없다. 스텝들끼리 모일 일도 없고 감독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망한 영화의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잡기도 힘든 신용불량자 비스무리한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는 기본이고 스텝들의 뒷담화는 보너스다. 촬영 당시에야 감독님이 지시하면 뒤에서는 씹퉁대지만 어지간하면 다 들어준다. 감독님 지시사항이 바보짓인지 삽질인지에 대한 판단은 개봉 후 흥행 성적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영화가 망하면 바보같은 감독 새끼가 삽질해서 영화가 망한 셈이기 때문에 욕도 오지게 얻어먹게 된다.


촬영 현장에서 아무리 천사같고 사람 좋다는 소리 듣는 감독이라도 영화가 망하면 아무도 찾지 않지만 영화만 성공하면 아무리 악마 같은 감독이라도 모두의 환영을 받는 완소 감독으로 변신한다. 영화만 성공하면 사이가 안 좋던 스텝도 연말엔 안부 전화하고 싸이월드 방명록에 인사도 남기는 사이가 된다. 술자리에서 만나면 내가 너 싫어해서 그런거 아닌거 알지? 식의 술깨면 낯간지러울 대화도 오고간다.


망한 영화의 스텝 분위기와 망해가는 회사의 직원 분위기는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덧글

  •  검은머리요다 2007/09/15 23:03 # 답글

    아휴... 망하고 망해도 난 좋은 영화만들겠어! 따윈 필요없군요.
  •  애드맨 2007/09/16 02:23 # 답글

    심형래 감독님이 계셔서 별 걱정은 안합니다.
  •  netphobia 2007/09/16 13:07 # 답글

    망한 영화 수두룩하게 한 본인입니다만... 그래도 인간하나 보고 친분 쌓는경우도 있어요 ㅜㅜ;
  •  애드맨 2007/09/17 01:39 # 답글

    저도 없진 않아요 ㅋㅋ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월급이 들어왔다.


영화 투자 제작 배급사를 희망하지만 단 한번도 투자금을 회수한 적이 없는 회사에서 월급이 들어온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같은 일이다. 영화를 제작한 적이 없는 영화사에 다니는 기획팀 직원인 나는 월급을 주는 우리 대표가 그저 고맙구 미안할 뿐이다. 언젠가는 대박 아이템을 발굴 개발해 대표가 투자한 월급의 수백배에 달하는 수익으로 보답하고는 싶지만 영화판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내가 능력이 모자라 과연 그럴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전에는 회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검토한다기 보다는 대충 대충 읽어본다. 그러다 보면 점심 시간이 되고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와 커피 마시고 잡담을 한다. 잡담이 지겨워지면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뉴스를 뒤적이며 대박 아이템을 찾아 헤맨다. 별 아이템이 없다 싶으면 새로 출간된 일본 소설 검토를 시작한다. 이렇게 오후를 보내면 퇴근 시간이 되는데 회사 돈으로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던가 그냥 퇴근을 하는데 보통은 그냥 퇴근을 선택한다. 야근한다고 대박 아이템이 발굴되는 것도 아니고 야근까지 해가면서 할 일도 딱히 없으니 칼퇴근에 대한 미안함은 없어진지 오래다.


이렇게 입사 후 몇 달을 널럴하게 보내고 나니 이젠 슬슬 회사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 대박 아이템 발굴이 쉬운 것도 아니고 그동안 투자한 작품 크랭크인 소식도 들리지 않고 투자한 작품 시나리오를 읽어봐도 이거 왜 투자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가 없다. 당연히 회사의 미래도 어둡게만 느껴진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을 신생 영화사에서 감독하라구 데려올 돈도 없고 울 대표가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과 친하지도 않은 것 같다. 어둡다.


이 블로그를 우리 회사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회사 사람들이 이 블로그를 보고 내가 썼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오리발을 내밀며 블로그는 폐쇄해 버려야겠지만 신생 영화사 기획실 직원이 한 두명도 아니고 블로그 설명에 절대 실화가 아니라고 써 두었으니 별 탈은 없겠지.


사실은 블로그를 접으려고 했다. 구글 애드센스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블로그였는데 구글 애드센스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계정은 70달러 정도 되는데 100달러 달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냥 깨끗이 포기했다.


막상 블로그를 폐쇄하려니 문득 어차피 이 블로그에 개인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는 싶었으나 딱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많이 있어 앞으론 그런 이야기들이나 일기처럼 올리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게 됐다.


회사 여직원들 대부분은 싸이월드에 거주하고 있고 나이 많은 직원들은 블로그에 별 관심이 없으며 대표의 인터넷 생활은 네이버와 야후 그리고 이메일 뿐이니 나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내일은 투자금만 받아놓고 진행은 지지부진한 제작사 사람들과 회의가 있다.


캐스팅 어려운 거 뻔히 알고 더 이상의 시나리오 각색도 무의미한 상황이라 별로 할말도 없는데 투자금이 들어갔으니 내버려둘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회의는 해야 되는 분위기다. 아마 시나리오 각색 방향에 대한 얘기나 두서없이 떠들다 말 것이다.


계약금만 챙기고 떠난 A급 작가 아무개씨가 부러울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블로그는 실화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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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  죄다 2007/09/12 22:51 # 답글

      음...꼭 대박 영화 만드시길...
    •  애드맨 2007/09/12 23:26 # 답글

      감사합니다.
    •  Rick 2007/09/13 05:16 # 답글

      세상은 너무 돈돈돈...저예산영화를 만들어 보세요 전 파이같은 영화도 좋던데
      사람들이 너무 획일된 시나리오, 가치만 요구하는 작품을 바래서
      정말 원하는 영화 만들어진것을 못봣습니다..

      그렇다고 노력안한다는 예기는 아닙니다.
      세상은 자신이 요구하는대로 더 벽이 높아지게마련이죠
      대박영화 만드는것도 좋지만, 그만큼 모두가 접할수있는 2000원영화 나왔으면하는 바랍니다.
      그러면 꼭 시장경재만을 탓하지않아도 좋은영화 더많이 볼수있을태니까요..

      참고로 전 만년 이러고 있습니다...가끔 개미눈물만한 보수가 들어오지만
      한사람에 국한되어 돈벌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저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도 많지요..
    •  애드맨 2007/09/13 08:10 # 답글

      노력할께요ㅜㅜ
    •  키리에 2007/09/13 09:26 # 답글

      아 좋네요 이런 솔직한 얘기.. 저도 회사 얘기 이렇게 속시원하게 쓰고 싶은데 행여나 들킬까봐..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서도..
    •  어이쿠 2007/09/13 11:00 # 삭제 답글

      우와 2년전에 제가 했던 일이네요. -_- 얼렁 뛰쳐나오셔야 합니다. ㅜㅜ
    •  애드맨 2007/09/13 22:29 # 답글

      키리에// 감사합니다. 저도 들키면 폐쇄입니다.
      어이쿠// 다들 그런말은 해주는데 나간다고 별 수 없어서요.
    •  netphobia 2007/09/14 19:23 # 답글

      뜨금해요... --;
    •  마에노 2008/06/20 14:09 # 답글

      링크 신고합니다.

      예전글부터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습니다.
    •  사바세계 2008/12/22 20:07 # 답글

      왠지 정말 비현실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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