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다.
퇴사 전 마지막 인사를 위해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가 그동안 정들었던 동료 직원들과 대표님을 만났다. 누구는 퇴사한다고 발표하면 상사가 발목을 붙잡고 사표를 수리해주지도 않고 면담에 면담을 거듭하느라 지치고 마음도 복잡해진다는데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표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 퇴사 처리가 되서 마음은 편했다.
출근(?)하자마자 내 옛날 책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개인짐을 챙긴 후 캐비넷에 랜덤으로 쌓여있던 시나리오와 서류들을 정리했다. 내가 떠나면 누군가의 업무가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친 않았다. 모든 걸 정리하고 사무실에 있던 동료들에게 퇴사 인사를 했다. 다들 힘들고 지친 상태라 누가 누굴 위로하고 배웅해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사람에게 섭섭하다고 말해주는게 이렇게 고마울 줄은 퇴사해보기 전엔 몰랐었다.
섭섭하다고 말해줄 뿐만 아니라 사무실로 음식들을 배달시켜 조촐하게 송별회도 열어줬는데 맛있게 먹는 척 하느라 목이 메일 뻔했다. 나를 위한 송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동료들이 배달시켜준 음식을 먹으며 지난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보니 역시 중요한건 마음 하나 뿐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삼겹살이면 어떻고 중국 요리면 어떠리. 진심이 담긴 떡볶이 하나면 충분하다. 동료 직원들과의 조촐한 송별회를 마치고 대표방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생각해보니 대표와 5분 이상 이야기를 해본 건 면접 때 이후 처음이었다. 첫 면접 때도 5분을 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5분도 안되는 시간 내내 이력서를 개인 블로그 포스팅처럼쓰는 건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꾸중만 들었기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대표님은 팀장에게 무슨 통보를 받았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들은 대로 대답했다. 대표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동안 운영해 온 식으로 기획팀을 돌리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거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며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좋은 기획 있으면 언제든지 들고 오라고 했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이고 회사도 어렵긴 하지만 앞으로 다른 회사를 알아보든 프리랜서로 뛰든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한 마음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뛰어야 된다며 나이도 나이인 만큼 몇 년 안에 뭔가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면 다시는 영화하기 힘들 거라는 걱정도 해 주셨다. 예상대로 밀린 월급과 퇴직금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격려와 조언에 감사드리며 남자답게 악수 한번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방에서 나왔다. 회사가 어려운건 어려운건데 자기 사업체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팀장은 일이 있어서 얼굴을 볼 순 없었고 넘버투가 대표방에 들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복도에 서서 동료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다들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넘버투가 대표방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회사에서 나왔고 동료 직원들은 입구까지 나와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에게서 우리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지 모르는 처지에 먼저 떠나는 직원 송별회를 열어주고 배웅까지 하는게 웃긴거 같다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자기들 배웅해 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개그가 인상깊었다.
넘버투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각자 대표와의 마지막 면담 내용에 대해 모니터를 했다. 모니터를 마치고 실업급여 수령 절차에 대해 조언까지 듣고 식당에서 나왔는데 아직도 밖은 훤한 대낮이었다. 밤이거나 깜깜했으면 술이라도 한잔 마셨을텐데 벌건 대낮이고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대낮에 여러 명과 한꺼번에 이별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 전에 나 하나 떠나도 아무 지장이 없을 이 거리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서는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는 감회에 젖어 쭉 한번 둘러보았다. 비록 지금은 불명예 퇴장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꿈을 좌절시켰던 이 거리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음과 열정으로 시드 머니를 마련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게임에선 다 털리고 오링나서 빈손으로 집에 가지만 다음 게임에는 꼭 이겨서 살아남고 싶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동안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공식 업무일지를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알아서 퇴사해버리는 엔딩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상 일이 내 맘 같지가 않군요. 뭔가 드라마틱한 엔딩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영화사 기획팀에 처음 입사할 때 만해도 내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일을 추진하며 현실과 부딪히다 보니 닳고 닳기 시작하며 타성에 젖더군요. 이건 영화사의 문제가 아니고 순전히 저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현실과 꿈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아무런 대안 없이 일을 하려다보니 주변 사람들과 상처만 주고 받으며 제대로 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표한테 보여줬다가 혼난 이력서가 바로 그동안 영화일을 하며 겪었던 적나라한 실패의 리포트였는데 의도치 않게 또 다시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해버렸군요. 부끄럽게도 제대로 해 놓은 일도 없는 주제에 실패의 리포트만 거의 책 한권 분량입니다.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그 순간 실패를 패배시킬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의지와 새 비전이 창출된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드디어 12월이 되었습니다.
즐거운 연말 되시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덧글
다크엘 2007/12/03 21:04 # 답글
맑음뒤흐림 2007/12/03 21:05 # 답글
numa 2007/12/03 21:05 # 답글
애환과 위트가 담긴 애드맨 님 글 읽는 재미로 이글루 들어왔었는데...ㅜㅠ
앞으로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수고하셨어요...
Labyrins 2007/12/03 21:07 # 답글
기분 착잡하시겠습니다...
힘내시고, 더 좋은 일 생기길 빌어봅니다.
PS.비공식 업무일지 끝이라고 포스팅도 끝이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DarthSage 2007/12/03 21:07 # 답글
힘내시고 앞으로 하시는 일 잘 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글이라도 애드맨님 글을 계속 읽고 싶네요 :)
이방인 2007/12/03 21:13 # 답글
레이린 2007/12/03 21:19 # 삭제 답글
많이 보게되어 동병상련을 느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드맨님만은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만...
늘 오늘 같지는 않겠지요. 힘 내시리라 믿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연말 되세요.
그때그녀언 2007/12/03 21:19 # 삭제 답글
2007/12/03 21:2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2007/12/03 21:38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정시퇴근 2007/12/03 21:44 # 답글
다른 시리즈의 포스팅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__) (^^)
알렉스 2007/12/03 21:58 # 삭제 답글
Azreal 2007/12/03 22:42 # 답글
마리 2007/12/03 23:25 # 답글
우연찮게 검색어로 찾아들어왔던 이 곳에서 님의 글에 참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추억하면서 지냈습니다. 님께는 죄송하게도 님의 블로그가 저에게는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네요.
몇 번이나 각자 다른 방식으로 영화계를 기웃거리고(영화잡지사, 영화 dvd출시사, 영화학과 대학원 기타등등) 결국은 바닥이 다 드러나 그 세계를 떠난 경험이 있기에 님의 글들에 참 마음이 많이 찡했다는 것... 믿어주시겠지요?
전에 말씀하셨듯이 이대로 헤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애드맨팬 2007/12/03 23:40 # 삭제 답글
이적 2007/12/03 23:46 # 답글
soPHIe 2007/12/04 00:38 # 답글
어쩌다 흘러들어와서는 열심히 읽은지 얼마 안됐는데 이런 비보(?)를 접해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리퍼러에 남겨주신 흔적이 있어서 반갑기도하고, 암튼 자수합니다. 한 일주 그냥 스토킹만 했다는 것을요 ;p
이상한 믿음일런지는 모르나 위로랍시고하니까 그저 예쁘게 보아주세요.
비교적 운 나쁜 일이 한번 있었으니 앞으로 좋은 일 하나가 반짝 나타날겁니다.
힘내세요 애드맨님
마력덩어리 2007/12/04 00:38 # 답글
피쯔 2007/12/04 00:39 # 답글
앞으로 하시는 일 잘 되시고...계속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ArborDay 2007/12/04 01:00 # 답글
2007/12/04 01:0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2007/12/04 01:22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2007/12/04 01:4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심리 2007/12/04 01:44 # 답글
앞으로 <흥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업무일지>를 읽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애드맨님 힘차게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wawany 2007/12/04 02:19 # 답글
슈지 2007/12/04 02:41 # 답글
야작 2007/12/04 02:54 # 답글
힘내세요~! 애드맨님~!
핀치히터 2007/12/04 03:14 # 답글
하치 2007/12/04 03:28 # 답글
핑크로봇 2007/12/04 03:59 # 답글
ㅎ훈이 2007/12/04 04:13 # 답글
tommi 2007/12/04 04:19 # 답글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07/12/04 07:24 # 답글
구라왕국 2007/12/04 07:36 # 답글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키죠 2007/12/04 08:38 # 답글
dARTH jADE 2007/12/04 08:47 # 답글
난나 2007/12/04 09:05 # 답글
힘내십시오.
아아... 2007/12/04 09:18 # 삭제 답글
11월 중순부터 재밌게 잘 읽고 있었는데 너무 늦게 발견해서 아쉽습니다.
일하다가 한번씩 열어보던 주황색 블로그가 유일한 낙이었다구요...
그래도 기다릴께요...ㅜㅜ
냐암 2007/12/04 09:33 # 답글
오사쯔 2007/12/04 09:57 # 삭제 답글
그럼...
이제, 또다른 시작이네요..
많은 분들 처럼 시즌2를 기대합니다!
감전조심 2007/12/04 10:16 # 삭제 답글
Dr.Dapper 2007/12/04 11:01 # 삭제 답글
좋은 일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07/12/04 11:14 # 삭제 답글
자의든, 타의든,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애드맨님은 길의 끝까지 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새로운 길이 열리겠지요.
부디 지금의 심정 잊지마시고,
유난히 설레이는 봄을 맞이하시길, 감히 바래봅니다.
파이팅! ^^
sesism 2007/12/04 11:45 # 답글
이번 게임에선 다 털리고 오링나서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지만 다음 게임에는 충만한 내공으로 꼭 이겨서 만렙까지 찍으시길 기원할께요 :)
gonz 2007/12/04 12:04 # 답글
그 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푹 쉬시며 온전한 자신의 시간 만드시길 :)
laxel 2007/12/04 14:48 # 삭제 답글
2007/12/04 15:3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푸드파이터 2007/12/04 17:20 # 삭제 답글
타선생 2007/12/04 18:01 # 삭제 답글
건강이 참 중요합니다.
퍼프 2007/12/04 18:34 # 답글
비공식 업무일지가 (죄송한 말씀일지 모르겠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피드가 뜰 때마다 잽싸게 들어와서 읽곤 했는데 마치신다고 하니 안타깝네요.
리얼한 맛이 살아있는 글 계속 더 읽을 수 있길,
그리고 앞으로 늘 좋은 일들 가득하시길 바라봅니다.
jules 2007/12/04 21:33 # 답글
마음씨 2007/12/04 22:43 # 답글
얼마있다가 "저희는 애드맨님 블로그 팬이었어요. 싸인해주실거죠?"하는 날이 와도 모른척 하지 말아주세효~
낼부터 시작될 시즌2 , 어떤 컨셉으로 이끌어가실지 기대할께요. 화이링~
마리 2007/12/05 00:09 # 삭제 답글
애드맨 2007/12/05 13:27 # 답글
coole12 2007/12/05 22:57 # 답글
내년에는 더 좋아지기를 바라구요.
라엘 2007/12/06 10:34 # 답글
sooop 2007/12/17 03:24 # 삭제 답글